현 건국대학교 문과대학 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조선중기 처사형 사림의 학풍 연구 남명학파와 화담학파를 중심으로-」로 문학 박사학위 받음. 외규장각포럼 자문위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전문위원, 역사스페셜 자문위원을 역임했으며, 현재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조선시대사학회 총무이사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조선평전』『조선을 움직인 사건들』『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조선중?후기 지성사 연구』등이 있고, 논문으로는 조선 왕실 의궤 분류의 현황과 개선 방안, 관료학자 이산해의 학문과 현실대응,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의 간행과 보관 등 다수가 있다.
규장각은 원래 왕실도서관에서 출발했지만 정조는 이곳을 학술 및 정책 연구기관으로 발전시켰다. 역대 도서들을 수집하고 연구하는 기관이자 정조의 개혁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정치기관으로 거듭난 것이다. 정조는 “승정원이나 홍문관은 근래 관료 선임법이 해이해져 종래의 타성을 조속히 지양할 수 없으니 왕이 의도하는 혁신정치의 중추로써 규장각을 창건하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정조는 당파나 신분에 구애 없이 젊고 참신한 인재들을 모아 개혁정치의 파트너로 삼았다. 규장각에서는 정약용을 비롯해 걸출한 학자들이 많이 양성됐으며 특히 박제가・유득공・이덕무・서이수와 같은 서얼들도 적극 등용했다. 규장각은 이제 조선 후기 학술과 문화중흥을 이끌어 가는 두뇌집단의 산실이 된 것이다. _p.5
1782년(정조 6년) 2월 당시 국왕 정조의 비상한 관심 아래 추진된 ‘강화도 외규장각 공사의 완공’을 알리는 강화유수(江華留守)의 보고가 올라왔다. 1781년 3월 정조가 강화도에 외규장각의 기공을 명령한 지 11개월이 지난 즈음이었다. 이를 계기로 강화도 외규장각에는 왕실의 자료들을 비롯해 주요한 서적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보관되었으며, 이후 100여 년간 외규장각은 조선 후기 왕실문화의 보고(寶庫)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行宮)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1776년 즉위 직후 정조는 창덕궁 내에 왕실도서관이자 연구소 성격의 규장각을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학술・문화운동을 주도했다. _pp.17~18
조선시대에는 국가의 중요한 의식이 끝난 후 전 과정을 담아 ‘의궤(儀軌)’라는 책을 간행했다. 의궤는 ‘의식(儀式)과 궤범(軌範)’을 뜻하는 말로 왕실에서 주관하는 의식이 시행되면 이를 정리한 책이다. 의궤는 전대의 의식과정을 모범으로 삼고, 후대의 시행착오를 방지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제작되었다. 선왕의 법도를 최대한 따르려는 유교 이념과 당대의 모습을 기록으로 남기려는 투철한 기록정신이 대를 이어 의궤를 편찬하는 힘이 되었다. _pp.47~48
승정원일기는 조선 왕조가 건국된 후 매일 기록된 일기이므로 일기의 전량이 남아 있다면 6,400여 권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 기록된 승정원일기는 임진왜란이나 1624년 ‘이괄의 난’ 같은 병화와 정변으로 대부분 소실되고, 인조대 이후의 것만 남아 있다. 이후에도 1744년(영조 20)과 1888년(고종 25)에 몇 차례 화재를 겪었고 일부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때마다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의 기록인 춘방일기(春坊日記)와 조보(朝報), 주서를 지낸 사람의 기록인 당후일기(堂後日記), 지방에까지 널리 수집한 각종 기록들을 정리하고 종합해 빠진 부분을 채워나갔다. _pp.87~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