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적 양심과 긍지를 상징해온 영원한 청년 시인. 만주 북간도 명동촌에서 아버지 윤영석과 어머니 김용 사이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5세 때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고,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 『달을 쏘다』『자화상』『쉽게 쓰여진 시』를 발표한다. 연희전문학교 시절 틈틈이 썼던 시들 중 19편을 골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내고자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시집 출간을 하지 못한 윤동주는 연희전문을 졸업한 후 1942년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릿쿄 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였다. 6개월 후에는 교토 시 도시샤 대학 문학부로 전학하였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해야 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문학적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조국을 잃고 일제의 교육을 받으면서 깊은 수치심을 느꼈다. 그를 고백 문학의 인상 깊은 시인으로 남긴 것은 이러한 체험을 바탕에 두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국어로 시를 쓰는 것이 죄가 되는 시대에 그의 울분은 우리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불행히는 그는 그 비극적이고도 진중한 체험을 시로 오래 풀어내지는 못했다. 그는 1943년 7월 14일, 귀향길에 오르기 전 사상범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다음해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2년형을 언도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복역중이던 1945년 2월, 해방을 불과 6개월 앞둔 시점에 스물여덟의 젊은 나이로 눈을 감는다. 그는 끝내 조국의 해방을 알지 못했다. 유해는 그의 고향인 연길 용정(龍井)에 묻혔다. 결국 그가 내고 싶어 했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을 모아서 동명의 유고 시집이 되었다. 이 시집은 1948년에 조국이 해방된 뒤 세상에 나온다. 1968년 연세대학교에 시비가 세워졌으며, 1985년부터 한국문인협회가 「윤동주 문학상」을 제정하여 해마다 시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