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는 희망이라는 아편을 제공했고, 이는 통째로 삼켜졌다. 특히 희망을 약속하여 사람들을 모으는 세계 반체계운동의 지도자들이 이를 삼켰다. 그들은 혁명―그러나 물론 이는 사실상 개혁을 의미하였다―을 통해 좋은 사회를 달성할 수 있으며, 일단 그들이 국가권력이라는 칼자루를 잡게 되면, 현 당국이 배출한 사람들을 전문가로 교체하여 그 사회를 관리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신이 물에 빠져 죽어가고 있는데 누군가 희망을 던져준다면, 그게 무엇이든간에 던져준 구명대를 움켜잡는 것이 합리적이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회고해보았을 때 누구도 세계의 인민대중을 비난하여, 그들이 자신의 불평불만을 표출해준 다종의 반체계운동에 지지와 도덕적 에너지를 제공했다고 탓할 수는 없다.
목소리 크고 활기 넘치고 위협적인 반체계운동에 직면한 당국은 둘 중의 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종종 그랬듯이 겁을 집어먹으면, 독사의 머리라고 생각한 것을 잘라버리려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짐승은 사실 히드라의 머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현 상태의 옹호자들은 사태가 복잡할수록 더 미묘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반체계운동이 실제로 잘못된 방식으로 체계의 이해에 복무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중을 동원하는 것은 대중을 어떤 방향을 이끌어가는 것을 뜻하는데, 국가권력은 대중운동의 지도자들을 매우 보수적으로 만드는 영향을 가져왔다. 더구나 그런 운동이 일단 권력에 오르면 그 지도자들은 지지자들의 격렬한 요구에 반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며, 그보다 앞선 이들만큼 또는 그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약을 파는 사람이 인정받는 혁명지도자일 때, 희망이라는 진정제는 훨씬 더 효과가 있었다. 인민대중은 만일 미래가 그들의 것이고 특히 그들이 '진보적' 국가를 가지고 있다면, 잠시 기다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들의 자녀들은 지구를 물려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 pp.103-104
자연과학자들이 사회과학을 향해 움직여가고(복잡성 연구) 인문학자들이 사회과학을 향해 움직여가는 것(문화연구)에 대해 자연과학과 인문학 내에서 반대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사실 반대는 맹렬했지만, 내가 보기에 이는 대체로 지연작용(rearguard operation)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복잡성 연구의 지지자나 문화 연구의 지지자 중 누구도 자신이 사회과학 진영으로 이동해가고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모든(심지어 대부분의) 사회과학자들이 이런 식으로 상황을 분석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는 우리 모두가 사실을 사실대로 말할 시간이다. 우리는 모든 지식의 사회과학화를 경유해 두 문화를 극복하는 과정 속에 있는데, 이는 실재란 구성된 실재라는 것과, 과학적/철학적 활동의 목적이 그 실재에 대한 가용하고 개연성 있는 해석, 즉 필연적으로 일시적일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정확한, 또는 대안적 해석들보다 그 시대에 좀더 정확한 해석에 도달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가능하다. (……) 우리는 이 근저에 놓인 실재가 이번에는 어떻게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는지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런 거울 속의 항해에는 더 정확한 학문적 분석과 덜 정확한 학문적 분석이 있다. 더 정확한 학문적 분석은 그것이 실질적으로 더 합리적인 실재르 구성하도록 세계를 돕는다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좀더 유용하다. 그러므로 진리의 추구와 선의 추구는 서로 뗄 수 없이 얽혀 있다. 우리 모두는 이 양자에 동시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 pp.298-299
오늘날 합리성이 한때 제공한 것처럼 보이던 보증들-권력을 쥔 자들에 대한 보증들, 그러나 피억압자에 대한 다른 보증들 또한-은 모두 사라지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해방을 향한 절규'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실질적 합리성을 은폐하는 형식적 합리성에 무자비하게 종속되는 것으로부터 해방되려는 절규이다. 해방을 향한 절규는 너무나 강력하게 성장하고 있어서, 프로이트가 말했듯이, 우리의 본질적 선택은 주로 그것을 문화의 특정한 요구들에 맞서게 할 것인가, 아니면 좀더 근본적으로 문화 그 자체에 맞서게 할 것인가이다. 우리는 암흑기에 들어서고 있으며, 보스니아와 로스엔젤레스의 공포는 확대되어 도처에서 발생할 것이다. 우리는 지식계급으로서의 책임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특정한 정치를 합리적인 것이라고 명시하고 그 장점을 직접 논하기를 거부함으로써 정치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사회과학은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지적인 부속물로 태어났다. 만일 사회과학이 계속 그런 상태라면 자유주의가 사망할 때 사회과학도 사망할 것이다. 사회과학은 사회적 낙관주의의 전제 위에 자신을 건립하였다. 사회적 비관주의라고 표기될 시대에 그것은 무엇인가 말할거리를 찾아낼 수 있을까? 나는 우리 사회과학자들이 우리 자신을 완전히 전화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사회적으로 적실성을 잃고 하찮은 학회의 하찮은 구석으로 밀려나서, 잊혀진 신의 마지막 수도자로서 우리 시대와 괴리된 채로, 무의미한 예식을 치르면서 비난받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가 생종하기 위한 핵심요소는 실질적 합리성의 개념을 우리의 지적 관심의 중앙으로 되돌려놓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pp.217-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