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학교에 들어간 것은 어머니가 강력하게 원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조선학교에 들어가야 조선 사람이 된다. 뿌리를 잊지 않는 사람으로 살기를 바란다.”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생각이 전혀 달랐습니다. 건설회사를 운영하시던 아버지는 일본 사회에서 자리 잡으려면 일본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식들 교육 문제 때문에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어릴 때는 어린 제가 보기에도 이혼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였습니다.---‘조선학교를 둘러싼 부모님의 갈등’ 중에서
초등학교 3학년 때 축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습니다. 조선학교에서는 스포츠라고는 축구밖에 없었습니다. 저학년 때 고학년들이 축구하는 걸 보고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야말로 수업시간만 빼면 항상 축구공이 몸에서 떨어질 때가 없었습니다.---‘첫 스승’ 중에서
축구 경기를 할 때 상대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특별히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중학생 정도 되면 어른처럼 서로 험한 말이 오가게 됩니다. 대부분 이런 말로 불을 지릅니다. “너, 조선으로 돌아가!” 일단 이런 말로 화를 돋우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받아칩니다. “너, 공부 다시 해야겠다.”
우리는 역사 인식이 뚜렷하니까 “돌아가라고? 우리가 일본에 왜 와 있는지 알아? 애초에…” 하고 설명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하지만 경기 중이라 “공부 다시 해라”라든가 “역사 공부 좀 해라”라고 짧게 받아칩니다. 그러면 일본 중학생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기 때문에 얼빠진 표정을 짓습니다. 그게 오히려 심각한 문제이고, 슬픈 일입니다만.---‘1등이 되지 못하는 멘털리티’ 중에서
2002년 조선대학교에 들어간 해에 한일 공동 월드컵이 열렸습니다. 한국의 16강 진출을 결정지은 포르투갈 전에서 박지성이 넣은 골은 아주 멋졌습니다. 박지성이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8년이 지나 제가 월드컵 무대에서 직접 뛰고 나서 깨달았습니다. 그야말로 스타는 젊을 때부터 대단한 경기를 보여주는구나 싶습니다. 그해 월드컵에서 가장 열광한 경기는 한국과 이탈리아의 경기였습니다. 마침내 한국이 이탈리아를 꺾었을 때는 몸이 떨릴 정도였지요. 설기현도 그렇고, 안정환도 그렇고, 그 자리에서 골을 넣는다는 건 굉장한 일입니다. 저에게는 한국 국가대표팀 선수 모두가 스타였습니다. 같은 민족으로서 열렬히 응원했고,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그해 또 하나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수상이 조선을 방문한 것입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수뇌회담, 평양선언 등이 이루어져서 두 나라 간 국교가 정상화되는 건 아닐까 기대했지만, 납치 문제 때문에 그럴 분위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때 대학 동기생이 “우리는 조국에 배반당했어.”라고 말하는 걸 듣고 울컥 화가 치밀었습니다.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에서 사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다니, 너희들 처음부터 믿지도 않았잖아,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저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조국을 믿은 재일이 바보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재일 사회가 붕괴하는 건 아닐까, 국제결혼으로 재일이라는 존재가 없어지는 건 아닐까 걱정했습니다. 저는 아직 인생 경험이 적지만, 이 시기에 가장 마음이 흔들렸던 것 같습니다. 국교 정상화를 기대했던 것만큼 충격이 컸던 것입니다. 지금은 불행한 과거가 있어도 조국은 조국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열띤 공격에 불타다’ 중에서
6월 15일. 드디어 브라질과의 경기가 열리는 날입니다. 브라질 대표와 승부를 겨룰 기회가 앞으로 몇 번이나 찾아오겠습니까. 우리는 좀처럼 얻기 힘든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처음에 브라질 국가가 연주되었는데, 벌써부터 눈물이 줄줄 흘렀습니다. 언제나 텔레비전을 통해서만 듣던 브라질 국가가 경기장 안에 울려 퍼지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들었습니다.
이윽고 조선 국가가 흘러나오자 더욱 울었습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습니다. 하나는, 꿈이 이루어졌다는 감동. 예전에는 이 자리에 오는 일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월드컵은 다른 세상의 일이고, 결코 닿을 수 없는 꿈이었습니다. 그런 꿈이 현실이 된다면, 누구든 울지 않고는 못 배길 터입니다.
또 하나는 나라를 대표해서 싸운다는 긍지와 기쁨입니다. 한 나라 대표로서 영광스러운 세계무대에서 싸우다니! 선택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바로 그 자리에 서기 위한 온갖 노력과 힘들었던 아시아 예선의 궤적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을 생각했습니다. 고교 시절 은사인 이태용 감독과 어머니가 경기장에 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눈물이 많으니까 울고 있을 거야. 지금까지 엄청 화나게 만들기도 했고 걱정도 끼쳤는데, 이걸로 조금은 효도가 될까, 이런 생각이 들면서 눈물이 마구 쏟아지는 겁니다.---‘눈물이 멈추지 않은 까닭’ 중에서
초등학교 때는 왜 이런 마이너리티로 태어났나 하고 불만을 품은 적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제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이나 취미를 바꿀 수 있고, 생활을 바꿀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성장 과정은 절대로 바꿀 수 없고, 배신할 수도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 어디에 살든, 재일은 재일인 겁니다. 결국 제 뿌리는 재일입니다. 결코 도망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재일이라는 말이 따라다닌다면, 거꾸로 세계 속에서 재일이라는 걸 적극적으로 표현하며 살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재일이라는 소수파로 태어난 저는 그 뿌리와 가치를 세계에 드높이 알리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디 살든지 재일은 재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