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전쟁과 4·19혁명 등 격동기에 유/소년을 보낸 저자는 청년 시절 백마부대의 일원으로 월남전에 참전했다. 서강대 국문학박사, 우즈베키스탄 국립니자미사대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초·중·고 교사를 거쳐 교과부 연구관, 타슈겐트한국교육원장, 구산중학교장, 서부교육청 학무국장, 강서교육청 교육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상일봉사학교 자문위원, 용옥장학재단 이사 등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저서로 『에밀졸라의 이입과 영향에 관한 연구』『한국고전문학에 나타난 우도론에 관한 연구』 및 다수의 논문이 있다.
중3 때 5·16을 맞았고 결혼해서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후 박정희 대통령을 잃었다. 가장 꿈 많고 젊은 시절을 박정희 치세에 보낸 것이다. 살면서 한때나마 가장 많이 미워했던 사람도 그분이었고, 자신의 언변이 부족함을 탓하며 가장 많이 자랑하는 사람도 그분이다. 60년대 대학생 때는 대통령 규탄 집회 참가로 휴학 조치를 당해 지엄하신 홀어머니의 마음을 상하게 해드렸다. 월남 전쟁터에 가서 목숨을 맡긴 청음초를 밤새 서면서 못난 자신과 내 나라를 원망하기도 했다. 이것은 대한민국의 격변기에 개인이 겪은 일이지만 우리나라는 그때 새롭게 태어나기 시작했다. 왕조시대 갑오경장 때에도 시도만 했지 못했던 일들을, 김일성에 비해 너무도 짧은 재임 기간 내에 해결, 척결, 추진하였고 유사 이래 최대의 성과를 이루는 토대를 마련했다. 축첩습관 척결, 깡패 소탕, 재건복을 착용한 채 절약과 검소를 가르치는 국정 운영, 하면 된다는 정신으로 나라를 가난의 구렁에서 구제한 새마을운동 등은 국민의 정신을 바르게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대일 청구권 자금 협상, 파독 광부와 간호사, 월남 파병, 고속도로 건설, 과학기술자 양성, 중화학 공업 육성은 6·25로 폐허가 되어 회생이 불가능할 것으로만 보였던 상황을 타개시켰다. 오늘 우리가 전 세계의 갈채를 받으며 선진국 대열에 근접한 것은 거인 박정희가 아니면 일궈낼 수 없는 일들이다. 국민들이 ‘해방 후 가장 위대한 인물’ 첫째로 연이어 박정희를 꼽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물론 거인 박정희와 반대의 길을 걸었던 모두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오늘을 가져오는 데 일조했다고 누군가 말한다면 기꺼이 그렇다고 인정하고 싶다. 과거는 미래를 위해 현재의 거울로 삼으라는 것이지, 부수고 침몰시켜서 현재를 어렵게 하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규석 (교육학박사, 교원대 교수, 전 교육과학부차관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