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폰이 울린다. 밤 10시인데 누굴까. 모르는 번호다. 받을까 말까. 뚜껑을 열어 귀에 댔다. 상대방이 먼저 말을 할 때까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3초 후. 낯선 남자의 목소리. “여보세요?” “예.” “캐피탈입니다. 이메일 주셨지요?” “예.” 캐피탈. 오늘 낮에 직원 모집공고를 보고 이메일로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번역/통역. 재택근무. 급여는 면접 후 결정. 주류 수입회사. 인터넷 구인란에는 그 외에도 먼저 일하던 여직원이 결혼해서 자리가 비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지금 컴퓨터 열어 보니 이메일이 와있네요. 취미가 등산, 영화, 음악감상, 나랑 똑같네요?” “예. 등산 좋아해요.” “사는 데가 어디예요?” “북한산 근처요.” “좋은 동네 사네요. 나도 가끔 북한산에 가는데.” 그의 목소리는 성우나 아나운서를 해도 좋을 만큼 맑고 격조가 있다. “15년 동안 미국서 살다가 작년에 들어왔어요. 고기와 주류를 수입해서 팔아요. 24세 때 여자를 실수로 건드려서 애를 낳았는데 아이만 얻고 그 조건으로 여자를 미국에 유학 보냈어요. 딸애는 지금 15세인데 국제학교에 다녀요. 학비만 1년에 2천만원이고 용돈까지 한 2천5백만원 들어요.” “....” “난 미국에서 학교 다니다 말았어요. 그림도 그리고 악기도 하잖아요.” “르네상스맨이신가 봐요?” “에이 뭘요. 미국에서 사업상 보스들이 모이는 파티에 가면 악기 한 가지씩은 연주할 줄 알아야 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