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정변 이후 1894년 청일전쟁 발발까지 10년간은 청이 조선을 ‘감국’한 시기였고, 이 시기에 원세개는 사실상 ‘조선총독’이었다. 그는 정치에서만이 아니라 경제부문에서도 통제를 강화하여 조선의 육상 전신선을 청에서 관리하게 했고, 조선과 일본 사이에 부설된 해저전선도 통제하고자 했다. 또한 조선에 대한 일본의 차관 공여를 막았다. 이 기간에 일본은 두 가지 이유로 조선을 지배하는 청을 견제하지 않았다. 첫째는 일본이 청을 통해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고, 둘째는 일본이 청의 역량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5장, p. 16
19세기 후반에 한국은 근대화라는 과제를 안게 되는 동시에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했다. 외래 자본주의의 경제적 침탈은 한국의 정상적 경제성장을 막았을 뿐 아니라 결국 한국이 주권을 상실하는 데 주된 원인이 됐다. 조선은 1876년에 쇄국정책을 포기한 뒤로 30년도 안 되는 동안에 산업화의 바탕이 될 수 있는 자원의 대부분을 외세에 빼앗겼다. 그중에서도 광산이권 부분의 침탈로 인한 손실이 막대하여 민족자본의 원천을 고갈시켰다. 조선은 아관파천으로 일본의 침략을 견제했으나 새로이 강화된 러시아의 경제적 침략에 시달렸다. ---8장, p. 202
1902년 1월 30일 영일 동맹이 체결됐다. 이 동맹의 유효기간은 5년이었다. 영국보다 일본에 유리한 영일 동맹이 체결된 것은 이토가 러시아와 협상을 진행 중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말하자면 양다리를 걸친 셈이었는데, 이것이 효과를 내주었다. 영일 동맹은 여전히 최대의 해군국가이자 상업국가인 영국과 신흥지역의 강국인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러시아에 공동으로 대응하게 된 것을 의미했다. 이때 영국은 가장 절실한 해군력의 협조를 일본을 통해 확보했으며, 일본은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동의는 아니지만 한반도에서의 권익을 보장받았다. 이로써 일본은 만주와 한국 문제를 놓고 러시아에 강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했다. ---10장, pp. 260~261
조선의 주권 수호에 열성적이던 미국 공사 알렌은 조선 위정자들의 부패와 무능에 지쳐서 끝내는 한국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포기했다. 알렌은 이재황에 대해 “이 나라의 커다란 해충이 돼있고, 저주의 대상이 돼있으며…로마가 불타는 동안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었던 네로 황제처럼 무희들과 놀고 있다”고 썼다. 1904년 1월 4일 알렌은 “만일 우리가 감정적인 이유로 이 ‘제국’의 독립을 지원하려 한다면 큰 과오를 저지르는 게 될 것이다. 이 사람들은 자치할 능력이 없다. 한국은 일본에 속해야 한다. 독립이라는 허구를 일본에 대해 더 유지하도록 하는 것은 잘못이다”라는 내용의 견해를 국무성의 록힐에게 보냈다. ---11장, p. 287
을사보호조약으로 외교권을 강탈한 이후에도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지화는 한국 민중의 저항으로 순조롭지 못했다. 일제는 한민족의 격심한 민족적 저항에 부닥쳐서 4년에 걸쳐 군사작전을 벌여야 했다. 평화적으로 합병이 이루어진 듯한 모양을 갖추기 위해 일본은 이 전쟁을 비밀로 했고, 그 군사작전 기록인 ‘조선폭도토벌지(朝鮮暴徒討伐誌)’도 비밀로 취급했다. 공식 기록에는 전쟁으로 취급되지 않았지만 틀림없는 전쟁이었다. 이 전쟁은 조선 왕조가 국가 수호를 위한 전쟁이라고 선포하지 않아 민중 차원의 전쟁이 됐다. 조선 왕조의 이러한 태도는 후일 한국의 독립에 불리하게 작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