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문헌에서 이양선에 관한 기록은 18세기 중반 영조 시대부터 보이기 시작하며, 순조 시대 이후로 크게 늘어난다. 다음은 영조 31년(1755) 12월 22일의 기록이다. “전라감사가 장달(狀達)하기를 “이국인(異國人) 8명이 함평(咸平) 땅에 표류하여 도착하였는데, 3명은 익사하고 그들이 탔던 배는 파손되었으니 육로(陸路)를 통하여 송환해야 하겠습니다”하니, 그대로 따랐다.“ (《영조실록》 31년 12월 22일) 서양 선박 출몰에 대한 조선 조정의 대응은 무조건 조선에서 물러가게 하는 것이었다. ---2장, pp. 82~83
청과 일본은 각각 1840년대와 1850년대에 서양에 문호를 개방했다. 그러나 조선은 그 뒤로도 20년이 넘도록 쇄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서구 열강이 볼 때 지리적으로 조선은 동서항행의 요충에 있는 나라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서구 열강은 일본이나 청에 대해서와는 달리 조선에 대해서는 시급히 개국시켜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당시 서구 열강의 자본주의 발전 수준으로 보아 영국만이 해외시장 개척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으나, 영국도 청과의 통교에 만족하고 있었다. 러시아는 1860년에 연해주 지방을 획득한 뒤로 조선에 관심을 가졌으나 자국 극동지역을 경영하는 데만도 힘이 벅찼다. 미국만이 태평양을 건너 중국 상해로 진출할 경우에 조선의 지리적 위치가 중요했으므로 일찍부터 조선의 문호를 여는 데 관심이 많았다. ---2장, p. 107
1873년 초부터 이른바 ‘정조론’이 다시 일어나 일본 정국을 흔들었다. 정조론의 배후에는 몰락하는 무사계급의 불만이 깔려 있었다. 명치유신의 일등공신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영도하는 정조론자들은 조선에 대한 일본 정부의 외교를 ‘연약외교’라고 비난했고, 일본 왕실의 존엄을 모독하고 일본인의 명예를 모욕한 조선을 응징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키자고 떠들었다. 반대자들도 시기상조라는 지적만 했을 뿐 정조론 자체에 대해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2장, p. 192
일본은 근대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봉건잔재가 큰 걸림돌이 되어 서남전쟁을 겪는 등 근대화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비하면 고려시대부터 중앙집권을 확립하고 관료제도가 발달한 한국은 근대화를 추진하기에 크게 유리했다. 정부가 양반계급의 생계를 책임지지 않았고, 독립적인 지방세력이 없었기에 정부의 정책시행에 큰 장애도 없었다. 일본의 유신정부가 중앙군을 확립하고 사족 계층의 경제적 특권을 폐지하는 과정에서 진통이 컸던 것을 고려하면, 만약 조선이 일본과 같은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했다면 일본보다 더 큰 성과를 거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장, p. 233
경제정책을 놓고 김옥균과 묄렌도르프는 대립했다. 묄렌도르프는 실질가치가 떨어지는 악화인 당오전의 주조와 유통을 강력히 주장했고, 그것으로 재정수입을 늘리려고 했다. 이에 비해 김옥균은 제도개혁으로 탈세를 방지하여 재정수입을 늘리자는 입장이었고, 차관 도입을 적극 주장했다. 당오전 주조차익이 친청 수구파의 정치자금으로 많이 전용됐으므로 김옥균은 지출이 보다 투명한 차관 도입을 선호했다. 차관 도입으로 서양, 일본과의 교류를 더욱 활성화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