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점촌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8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새를 기다리며」가 당선되어 등단, 「겨울 무지개가 있는 풍경」 「망각에게」 「잡초를 노래함」 「풍고풍하」 등의 작품을 발표했다. 종합교양도서정보지 월간 『booksetong』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자음과모음의 청소년평전 『사랑과 고통을 그린 화가 프리다 칼로』를 출간했다.
게오르그는 마을 소년들의 대장이었다. 그와 슈바이처 사이에 싸움이 붙었을 때, 그래서 소년들은 당연히 게오르그가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슈바이처가 골목대장 게오르그를 보기 좋게 때려눕혔던 것이다. 슈바이처는 의기양양한 얼굴로 게오르그를 내려다보았다. 걸핏하면 대장이라고 거들먹거리곤 하던 게오르그를 이겼다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그때 게오르그가 분하다는 듯 씩씩대며 말했다. “나도 너처럼 일주일에 두 번씩 고깃국을 먹었더라면 절대로 너한테 지지 않았을 거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슈바이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 p.11
위도르 교수는 음악학교에서 파이프오르간을 전공하는 학생 이외의 다른 학생은 가르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교수는 처음 만난 슈바이처에게 물었다. “어떤 곡을 연주해 보겠나?” 슈바이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물론 바흐입니다.” 연주를 듣고 난 위도르 교수는 그 자리에서 슈바이처를 제자로 받아 주었다. 뮌히 선생님으로부터 훌륭한 예비 교육을 받은 덕분에 슈바이처의 기량은 이 까다로운 대가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을 만큼 성숙해 있었던 것이다. --- p.25
성 니콜라이 교회에서 그가 받는 봉급은 월 100마르크였다. 성 토마스 기숙사의 숙식비가 싸고 그가 워낙 검소하게 생활했기 때문에 넉넉하지 않은 봉급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일상을 꾸려 갈 수 있었다. 그가 맡은 직책의 한 가지 좋은 점은 학문 연구와 음악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두 분 노목사의 호의로 설교를 맡아 줄 대리인만 구해 놓으면 견신례 준비 교육이 없는 봄방학과 겨울방학 동안 휴가를 가질 수 있었다. --- p.39
그의 집 앞에는 매일 시도 때도 없이 환자들이 나타났다. 일은 매우 어려웠다. 환자와 의사 소통을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연히 와 있는 통역에 의지해야 했고, 여행 가방에 넣어 온 약이며 기구, 붕대는 밀어닥치는 환자들을 돌보는 데 턱없이 부족했다. 통역 겸 조수를 자청했던 은쳉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삼키타 미션스쿨의 흑인 교사인 그는 슈바이처가 도착하기 1년 전에 편지로 병원에서 근무하고 싶다는 뜻을 알려 왔다. 슈바이처는 자신이 도착하면 곧 랑바레네로 오라는 전갈을 보냈었다. 그러나 그는 오지 않았다. --- p.109
사흘째 되던 날 저녁, 해 질 무렵이었다. 배는 물속에서 놀고 있는 한 무리의 하마 떼를 헤치며 느릿느릿 나아가고 있었다. 하마들의 평화로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어떤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모든 생명을 사랑해야 한다. 이 세상에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라고 예수께서도 말씀하시지 않았던가.’ 바로 그 순간 ‘생명에의 외경’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것은 그때까지 그가 예감해본 적도 없고 구해 본 적도 없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