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개개인은 어느 정도의 힘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고 외부대상에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우리는 법적 책임이나 상업적 목적을 위해 우리가 만나는 그런 성격을 가진 사람으로 완전히 파악되는가. 아니면 가족이나 절친한 친구와 같이 우리가 자신과 동류라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전체를 구성하는가. 인간존재의 본질을 밝히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경험세계를 과학적으로 해명함과 아울러, 경험 너머의 세계를 철학적으로 사유하는 작업을 요구한다. 인간은 외부환경과 동떨어져 홀로 존재하지 않고, 그렇다고 계몽적 이성으로 존재를 전부 드러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존재를 알기 위해서는 우주·자연·타자·생명 등이 인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고, 이러한 주제에서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인간은 우주의 본성을 지닌 소우주로서 우주의 절대적 무한성에 닿아 있고 우주와 상시적으로 교감한다. 그리고 자연공동체 내에서 자연의 일부로서 자연과 공존하고, 타자와 함께 살아가면서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자기정체성을 갖는다. 나아가 인간은 모두 영성을 지닌 신성한 존재로서 성스러운 경애에 도달할 수 있는 본원적 힘을 지니고 있다. ---p.15
인간의 삶이란 것이 아침에 일어나 직장에 가서 이런저런 일을 하다가 퇴근하여 저녁을 먹고 텔레비전을 보다가 잠자리에 드는 것이 전부인가. 때로는 예외가 있어 목돈을 벌고, 승진을 하고, 가족과 외식을 하고, 친한 친구를 만나고, 멀리 여행을 떠나고, 짜릿한 섹스를 하고, 나아가 잠시 사색에 빠지거나 지적 논쟁에 참여한다고 해서 그것이 인생의 모든 것인가. 이런 활동에서 모든 사람이 찾아 헤매는 완전한 자유와 삶의 궁극적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가 사는 도시에는 온통 건물이 늘어서 있고 거리에는 상가들이 줄지어 서 있다. 공장에도, 사무실에도, 학교에도, 극장에도, 상점에도, 식당에도 사람들이 우글거린다. 그들은 일상적으로 먹고, 마시고, 보고, 읽고, 대화하고, 거닐고, 배설하고, 그리고 각종 일을 한다. 그러나 이것이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종점이거나 삶의 전부는 아니다. 우주적 정체성을 지니고,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타자의 현존에 기여하는 위대한 인간은 결코 하찮은 욕망에만 갇혀 있지 않다. 인간은 신성을 지닌 존재로서 물질과 이기를 넘어 정신적이고 이타적인 욕구를 추구한다. 그리고 반복적인 일상생활 속에서도 삶의 의미를 생산하고 자신의 잠재력을 끝까지 계발하려고 노력한다. 또한 청년기를 지나 장년과 노년에 이르러 깨달음을 얻게 되면서 초월적 가치를 추구하고 본래의 자기원형으로 되돌아가려고 갈망한다. 인간은 이러한 욕구를 충족하지 않고서는 결코 행복에 이를 수 없다. ---p.109
인간은 아침에 일어나 불을 켜고, 세수를 하고, 신문을 읽고, 아침식사를 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거의 모든 활동에서 국가와 시장이라는 제도의 영향을 받는다. 국가와 시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인간은 많은 불편과 고통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주에 관한 욕구는 물론이고 대외적 안전, 교통·통신 수단, 건강과 교육, 나아가 사회적 유대나 지적 성취, 인간의 자존과 정신적 만족에 이르기까지 많은 것이 국가와 시장의 각종 기제에 빚지고 있다. 심지어 의식을 하지 않고 잠자고 있는 순간에도 국가와 시장이라는 제도가 없으면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없다. 그렇다고 국가와 시장이라는 외피가 창조적이고 의미 있는 삶을 갈구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구에 적합한 자연스러운 제도는 아니다. 오히려 국가와 시장이라는 기능체계는 인간의 자유로운 기질을 획일화하고 다중적 정체성을 은폐하여 인간을 의미 없는 족속으로 전락시킨다. 따라서 국가와 시장에서는 인간의 자기완성에 필요한 정신·이타·의미·향상, 그리고 장년기 이후에 나타나는 욕구를 충족하기 어렵다. 국가와 시장은 인간을 소외하는 근대적 기획으로서 근본적으로 생성을 떠나 허무에 닿아 있다. 인간이 차원 높은 욕구를 충족해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국가에 의한 기만과 시장에 내장된 허구를 간파하고 이들에 대한 유토피아적 관념을 전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p.201
시민사회에서 사람들은 같은 선호나 사상을 추구하는 사람을 만나고,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며, 좋은 삶을 만들어가는 체험에 참여한다. 자율·참여·연대의 가치가 배태하는 속에서 사람들은 서로 관계를 맺고 소통하며 공감한다. 그래서 시민사회에는 우정이 흐르고 감성이 계발되며, 신뢰가 싹트고 책임이 행해지며, 창의가 분출하고 영성이 깨어난다. 그야말로 시민사회는 우리 가까이서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시민문화의 공간이면서도 국가춿 시장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발견되지 않았던 숨겨진 보물이다. 다중적 정체성을 가진 인간의 질적 욕구는 시민사회에서 비로소 충족될 수 있다. 시민사회는 자기완성으로 향하는 인간에게 초월적 에너지를 부여하고 타자에 대한 진지한 책임을 추동한다. 그리고 삶의 의미를 생산하는 실질적인 수단과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토대를 함축한다. 또한 시니어의 최종 정착지로서 의미 있는 노후생활의 동력을 제공한다. 우리가 근대적 이성과 체계화된 제도의 울타리를 벗어나 참된 자기를 깨닫고 잠재된 욕구를 불러일으킬 때, 시민사회는 그것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거처가 된다. 시민사회는 바로 정신적 존재인 인간이 경박스러운 소유를 넘어 존재감을 되살리고, 살아야 할 책임의 원천을 발견하며, 완전한 자기를 향한 열망을 충족하는 곳이다. 그래서 새로운 존재양식을 찾아 다중적 욕구를 충족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고자 하는 모든 사람은 결국 시민사회로 귀착하게 된다. ---p.291
시민사회는 물질적·생물학적 인간을 넘어 정신적·철학적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완성을 향한 다중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를 제공한다. 따라서 인류가 오랫동안 열망했던 이상적인 삶을 실현하려면, 국가와 시장 바깥에 쪼그리고 앉아 있는 시민사회를 일으켜 세워 적극적으로 발전시켜야 한다. 물론 국가와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자기완성의 원천으로서 기능하는 시민사회도 현실에서는 많은 모순과 무력함을 내포하고 있다. 시민사회는 실상 물질적 유혹에 취약한 이념적 토대를 가지고 사적 권력과 이익을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또한 각종 상징과 기호가 인간의 감각을 자극하고, 국가와 시장의 논리가 유입되어 철저한 분석과 논리를 추종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제도화된 패턴에 따라 진행 중인 삶의 방식을 고집하거나 특정한 전통과 이데올로기에 집착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시민사회는 내부의 반성장치를 동원하여 끊임없이 변신하고 재구성해갈 필요가 있다. 이때 NGO가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다. NGO는 시민사회 내부의 모순을 비판하고 운동의 원리를 강화함으로써 개혁을 촉진한다. 그리고 공공의 원리와 연대의 가치를 중시하고, 기존의 패턴을 넘어 새로운 생활방식을 발견하는 창의성을 지닌다. 따라서 NGO는 시민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고 능력을 증대해 시민사회 고유의 잠재력을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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