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국가박사학위 부논문은 출간되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푸코의 부논문은 『인간학』에 대한 ‘번역과 해설 및 주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푸코는 국가박사학위 주 논문인 『광기의 역사』를 논문심사위원회에 제출하기 위해 우선 출판사를 찾아야만 했다. 1968년 이전까지는 그렇게 하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논문의 출판 때문에 푸코가 겪은 어려움은 잘 알려져 있다. 더욱이 부논문의 심사위원을 맡은 장 이폴리트와 모리스 드 강디야크는 푸코에게 『인간학』 번역과 그 책에 대한 해설을 분리시킬 것을 권유했다. 이 해설에서 심사위원들은 이후 계속 연구되어야 할 독자적인 논문의 단초를 보았던 것이다. 푸코의 계속된 이 연구는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으며, 그것이 바로 『말과 사물』이다. ---pp. 14~15
이 책은 25년 동안 씌어졌고 발전되어왔으며, 칸트의 사유가 새롭게 표명됨에 따라 틀림없이 변형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오직 〔이 책의〕 마지막 판본만을 가지고 있다. 이 책은 이미 〔세월의〕 퇴적작용으로 뒤덮인 채로, 그리고 자신을 형성한 과거에 묻힌 채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이 25년 동안의 시기는 초기 연구가 종결되고, 비판철학이 시작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칸트 사유의 세 부분은 균형 있게 전개되었으며, 마침내 라이프니츠 철학의 복귀, 슐체의 회의주의, 피히테의 관념론 등에 맞설 수 있는 〔사유〕 체계가 확립되었다. 이러한 25년 동안의 세월이 『인간학』 안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이 세월의 깊은 여러 지층의 연대를 측정해주는 외적이고 확실한 단일 기준 없이, 세월의 흐름은 계속되었다. ---p. 23
그러므로 여기에 『인간학』과 동일한 높이에서 그에게 고유한 경사선을 제시하는 몇 가지 측량지표가 있다. 처음에는 『강의 초안』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인간학은 자연과 인간, 자유와 사용, 학교와 세계 간에 수용된 분할 속에서 전개되었다. 〔그러나〕 이제 인간학의 균형은 그것들의 승인된 통일에서 찾아지며, 이 통일은 적어도 인간학저거 층위에서는 결코 다시 의문시되지 않는다. 인간학은 이용의 상호성 안에서 자유와 사용이 이미 묶여 있는 영역, 할 수 있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이 그것들을 서로 비교 평가하는 유희의 통일성 안에서 상호 종속되는 영역, 문화의 규정 안에서 세계가 학교가 되는 영역을 탐구한다. 〔이제〕 우리는 본질적인 사항을 건드린다. 『인간학』에서 인간은 자연적 인간도 자유의 순수 주체도 아니며, 인간은 그와 세계와의 관계에서부터 이미 이루어진 종합 안에서 파악된다. ---pp. 66~67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내용 자체는 근원적인 자율성에 따라 전개될 수 없다. 왜냐하면 우선 인간은 세계의 거주자로, 즉 “세계 거주민”인 “세계에 속하는 인간”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모든 고찰은 순환적으로 세계에 대한 고찰로 되돌아간다. 그러나 여기서 관건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 자연에 대한 인식을 함축한다는 자연주의적 관점이 아니다. 질문되는 것은 현상의 층위에서 동물로서의 인간을 파악하고 정의하는 규정이 아니라, 자아와 ‘나는 존재한다’에 대한 의식의 전개이다. 요컨대 주체는 운동 속에서 스스로 촉발되며, 그 운동을 통해 자기 자신에 대한 대상이 된다. 즉 “나는 있다. ?내 밖의 공간과 시간 안에는 세계가 있으며, 나 자신은 세계 존재이다. 나는 이러한 관계와 감각(지각)의 움직이는 힘을 의식하고 있다. ?인간으로서의 나는 나 자신에게 외부적인 감각 대상, 즉 세계의 일부이다.” ---p. 96
그러므로 『인간학』은 세월을 거친 『비판』에 준거하여 “체계적으로 계획된” 것이다. 다른 한편, 『인간학』은 대중적인 가치를 지닌다. 왜냐하면 『인간학』의 성찰은 주어진 〔대중적인 일상〕언어 안에 위치하는데, 이 언어는 『인간학』의 성찰이 그것에게 아무런 수정도 가하지 않으면서 투명하게 만든 것이고 또한 이 언어의 특성 자체는 보편적 의미가 탄생하기에 적합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학적 관점에서 진리는 종합의 시간적 분석을 통해서, 그리고 언어와 교환의 운동 속에서 구체화된다. 여기서 진리는 자신의 원초적인 형태를 찾지 않으며, 자신의 구조에 대한 선험적인 계기나 주어진 것에 대한 순수한 충격도 발견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시간 속에서, 이미 말해진 언어 속에서, 시간적 흐름 안에서, 그리고 결코 0도로 주어지지 않는 언어적 체계 안에서, 진리는 자신의 근원적 형태로서 어떤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진실로 시간적이면서 실제로 교환되는 운동 중에 있는 경험의 한가운데에서 출현한 보편성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내감의 형식인 마음에 대한 분석은 인간의 보편성의 형식인 세계 시민적인 규정이 된다. ---pp. 125~126
이제 우리가 출발했던 문제로 돌아갈 시간이다. 그 문제는 인간학적 가르침에 의해서 『비판』에 덧붙여진 반주, 즉 그것을 통하여 칸트가 인간에 대한 경험적 인식의 끊임없는 축적으로 초월적 성찰의 노력을 배가시킨 단조로운 대위법에 대한 것이다. 칸트가 25년 동안 ‘인간학’을 강의했었던 것은 대학 교수의 삶이라는 그의 〔직업상의〕 책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분명히 다른 어떤 것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것은 칸트적 문제의 구조 자체와 연결된 다음과 같은 끈질긴 물음이다. 무한자의 존재론을 거치지 않고 절대자의 철학에 의해 정당화되지 않는 성찰 속에서 어떻게 유한성을 사유하고, 분석하고, 정당화하고, 정초할 것인가? 이 질문은 ‘인간학’ 저작에서 실질적으로 작동하지만, 그러나 이 질문은 경험적 사유에서는 자신 스스로를 숙고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학’에서 자신의 진정한 차원을 얻지 못한다. 여기에 칸트적 기획에서 ‘인간학’이 가지는 다음과 같은 주변적인 특성이 있다. ‘인간학’은 본질적인 동시에 비본질적이다. 즉 중심에서 항상 벗어나는 변함없는 가장자리이지만, 그러나 끊임없이 중심을 언급하면서 질문한다. ---p. 144
그러나 우리가 이 비판의 모델을 부여받은 지 반세기가 넘었다. 니체의 기획은 인간에 대한 물음의 확산이 마침내 끝나는 지점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신의 죽음은 절대자〔의 존재〕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동시에 인간 그 자체를 살해하는 이중적인 살해 행위 안에서 나타나지 않는가. 왜냐하면 자신의 유한성 안에서 인간은 그가 부정하는 동시에 미리 알리는 무한자로부터 분리될 수 없으며, 신의 죽음은 인간의 죽음 안에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인간과 관련해서도 무한자와 관련해서도 자유로울 것이며, 유한성은 종말이 아니라 끝이 곧 시작이 되는 시기의 굴곡과 결절점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유한성에 대한 비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철학의 영역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도정은 그 질문을 거부하고 무력하게 만드는 초인이라는 답변을 통해서 완성된다.
---pp. 148~1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