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전 쯤, 몽고제국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는 칭기즈 칸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후계자 오고타이(卨闊台 몽고의 태종)가 명재상 예뤼추차이에게 “아버지가 이룩한 대제국을 개혁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예뤼추차이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한 가지 이로운 일을 시작하는 것은 한 가지 해로운 일을 줄이는 것만 못하고興一利不若除一害 한 가지 일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은 한 가지 일을 줄이는 것만 같지 못하다生一事不若滅一事
어떻습니까? 새로운 일을 만드는 것보다 지난날의 폐단을 줄이는 것이 현명하다는 천여 년 전에 있었던 이 문답을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에 적용해도 아무 손색이 없질 않습니까. 그러므로 역사는 준엄합니다. 확립된 식견(識見)이나 엄정한 표준(標準)이 없이 일을 처리한다면 좋은 국가, 좋은 기업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식견이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해와 분석, 효율과 깊은 관계를 갖는 그야말로 전문지식을 말합니다. 표준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판단과 결단을 유도하는 윤리성입니다. 이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정치건 기업이건, 또 교육이건 제대로 될 까닭이 없습니다. ---제1강. 세종은 세계와도 바꾸지 않겠다 중에서
지난 번 KDI에서 발표한 리포트를 보면 가슴 섬뜩한 구절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국 국민은 준법정신의 결여로 연 성장률 1%를 깎아먹고 있다.” 준법정신이 결여된 까닭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들이 변변치 못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다소간 법을 어기더라도 내 실익만 챙길 수가 있다면 아무 가책도 없다는 식의 발상이야 말로 ‘준법정신’이라는 말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심하면 그런 행위를 어린 자식들이 보는 앞에서 당당하게 입에 담고, 또 당당하게 행동으로 옮기는 어머니들의 한심한 모습을 우리는 얼마든지 볼 수가 있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의 불행입니다. 게다가 그 어머니들은 모두가 대학을 나오고, 대학원을 나온 식자들이라는 사실이 우리를 좌절하게 합니다. 사람에게 인품이 있듯 나라에도 품격(國格)이라는 게 있습니다. 돈은 많은데 사람 노릇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을 일러 ‘졸부’라고 하고, 그런 졸부와는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 우리네 상정이듯 비록 경제규모가 크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양새가 넉넉하거나 떳떳하지 못한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거나 심하면 외면을 당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