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은 ‘자유의지의 현존’을 서술하는 방식으로 정의로운 사회질서의 원칙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여기서 ‘현존’이라는 말은 ‘자유의지’가 실현되려면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혹은 제도적 전제들 전체를 가리킨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원칙이라는 말로 헤겔이 뜻하는 바가 분명해짐에 따라, 이제 『법철학』의 과제에 대한 우리의 잠정적인 이해에도 다음의 한 가지 핵심 성분이 더 추가된다. 모든 개별주체들을 소통적 관계 ? 그 자신의 고유한 자유의 표현으로 경험될 수 있는 소통적 관계 ?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해 주는 각종 사회적·제도적 조건들, 그것들이 곧 정의로운 사회질서의 총체로 파악되어야 한다. 주체들은 그런 유형의 사회적 관계들에 참여할 수 있는 정도만큼, 그들의 자유를 강제 없이 외부 세계에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헤겔의 의도이다. --- p.30
『법철학』의 의도와 제목이 첫눈에 놀랍고 기이해 보였던 것처럼, 『법철학』의 전체 구조와 목차도 독자들에게 일단은 무척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헤겔이 「서론」에서 제시한 기획적 정식화들 뒤에 숨겨진 의도가 밝혀진 이상, 헤겔의 본론이 개별적 자기실현의 소통적 조건들을 점진적으로 재구성해 나가는 식으로 전개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충분히 지당해 보인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논증 도식이 『법철학』의 각 절들을 나누는 얼개 원칙 Gliederungsprinzip이라고 추측한다면, 『법철학』의 체계적 요건 Systemzwang은 물론이고 보다 복잡한 헤겔의 여타 의도들을 가치 절하해 버리는 것이다. --- p.36
헤겔이 ‘도덕적 관점’이라고 부르는 것 속으로 진입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을 법적 권리의 자유 모델과 비교해 보는 것이다. 우리가 앞서 확인했듯이, 법적/권리의 자유 표상을 따를 경우 개인적 자유의 조건은 나 자신의 이해 관심사를 실현하기 위해서 그때마다 법적 질서의 틀 안에서 금지되지 않은 것을 행할 수 있는 권한으로 축약된다. 달리 말해, 나 자신의 고유한 자유의 실현을 위해서는 각 개인들에게 다양한 행위 선택지를 보장해 주는 주관적 권리들의 다발, 그 이상이 필요치 않다. 헤겔이 이 모델에 대해 제기한 이의는, 그로 인해서 타인의 자유를 내 자유의 단순한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개념적 여지가 마련됐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헤겔의 핵심적인 이의제기는, 그 표상은 ‘각자가 그때마다 무엇을 자유로운 행위의 목적으로 간주하는지’를 개인의 자유 개념과 전적으로 무관한 사안처럼 취급한다는 것이다. 헤겔은 [추상적 권리/법의] 이 본질적인 결함을, 자신의 텍스트 두 번째 장에서 도덕적 관점으로 주의를 돌리는 결정적 이유로 제시한다. 왜냐하면 여기 도덕적 자율성의 이념에서는, 이성적 자기규정의 산물인 것만이
자유로운 행위로 간주됨으로써, [추상적 권리/법과는] 정확히 다른 쪽에 있는 개인의 자유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 pp.63-64
[헤겔의] “해방” 개념은 자유에 대한 긍정적 이해와 부정적 이해를 포괄한다. 이 이중적 의미의 해방 개념이 이미, 헤겔의 관점에서 인륜성 영역이 수행해야 할 여러 겹의 과제들 쪽으로 첫 번째 빛을 비춘다. 즉, 시대진단과 정의론의 내적 결합[으로 이루어진 해방 개념]으로부터, 인륜성 영역이 충족해야 할 첫 번째의 최소 조건이 도출된다. 인륜적 영역은, 일반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개인적 성취와 자아 실현의 가능성들을 마련해 줄 때에만 ? 그럼으로써 이 가능성들을 활용해 각 개별주체들이 자신의 자유를 실천적으로 구현할 수 있도록 해 줄 때에만 ? 개인들을 “비규정성의 고통” 즉 채워져 있지 않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인륜성의 영역은 ? 그 밖에 이 영역을 특징짓는 규정이 무엇이든 간에 일단은 ? 자기실현의 목적들로서 유의미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여러 가지 삶의 가능성들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기준만으로는, 지금까지의 논의에 비추어 볼 때 인륜성 영역이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이는 모든 성질들을 다 포괄할 수 없다. 「인륜성」 장에서의 헤겔의 논의를 따라가기 전에,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암묵적으로 거론되었던 여타 기준들을 분명히 해 보면 좋을 것이다.
--- pp.82-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