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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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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본을 생각한다

: 퇴락한 반동기의 사상적 풍경

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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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08월 24일
쪽수, 무게, 크기 324쪽 | 428g | 140*210*30mm
ISBN13 9791187890041
ISBN10 1187890049

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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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일본’은 근대의 시발점부터 우리에게 어려운 질문이었고, 지금까지 그렇게 여전히 남아 있다. 더구나 최근 일본은 동아시아의 평화에 커다란 위협으로 다시 떠오르고 있다. 일본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근대사의 짐인 식민지배의 유산을 올바르게 극복하기 위해, 또한 동아시아와 세계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일본의 국수주의자나 우파를 비판하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그보다 더 어려운 것은 일본 사회의 ‘리버럴’한 언설을 깊은 의미까지 파고들어 비판하는 일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일본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도 없고, 그 문제점을 극복할 수도 없을 것이다. 내 생각으로는, 많은 경우 한국인들의 일본론은 이 지점에 약점이 있는 듯하다. 이 책을 통해 나는 내 나름대로 이 어려운 문제에 도전해보았다. --- p.6

1990년대에 들어서 한국의 ‘나눔의 집’에 사는 전 ‘위안부’ 할머니들을 테마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가 일본에서도 공개됐습니다. 그것이 나카노의 영화관에서 상영됐을 때 우익이 방해를 하면서 스크린에 불을 끄는 소화제를 뿌렸습니다. 그런 일이 벌어져선 안 된다는 얘기를 하는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발언을 했습니다만, 대부분이 예술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에 대한 폭거라고만 얘기했습니다. 그 영화의 내용, 일본 국가의 식민지배 책임과 여성에 대한 인권침해라는 주장이 공격당했다는, 그 문제의 핵심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언론의 자유라는 말만 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공허한 주체입니다. 그 주체의 공허함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불러들였다고 봅니다.
이 공허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위해 연대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 싸우자고 합니다. 분명 그래야지요. 하지만 그들은 자기 나라의 식민주의에 맞서 싸워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우리와 연대할 수 있습니다. --- p.36~37

좀더 큰 역사 속에서 살펴본다면, ‘위안부’ 문제는 세계적인 동서 대립 구조의 종언과 함께 떠오른 사태입니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의 권위주의 체제가 동요하고 민주화가 진행된 결과 피해자들이 이름을 밝히며 나설 수 있게 됐고, 지원 운동도 활발해졌습니다. 그때까지 봉인돼 있던 일본의 전쟁범죄 문제가 표면으로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당사국인 일본에서는 이 벡터가 역방향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동서 대립 시대의 종언이 ‘탈이데올로기 시대’라는 천박한 구호와 함께 진보적 리버럴 세력의 자기 해체라는 방향으로 진행됐습니다. 사회당·총평 블록 자체가 ‘55년체제’라 불린 구체제에 의존해온 것이긴 하지만, 그런 사회 변화 속에서 새롭게 진보 세력을 결집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채 스스로 자기 붕괴의 길을 택한 것이 치명적이었습니다. 사회당은 소선거구제를 수용하고, 자민당과의 연립도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일관되게 국가주의에 저항해온 일본교원노조는 방침을 전환해 학교 행사 시 히노마루 게양, 기미가요 제창을 용인했습니다.
그때 항상 주고받은 상투어가 “시대는 변했다. 이젠 이데올로기 시대가 아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진보 세력이 스스로 탈이데올로기라 칭하면서 이념이나 이상을 내버렸을 때 우파 세력은 오히려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의 성채를 강화하고 반격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 p.80~81

재특회 등의 주장은 단지 인권침해 차원에 그치는 게 아니며, 그 밑바탕에는 식민지배 책임과 전쟁 책임을 부인하려는 머조리티의 욕망이라는 광범한 토양이 깔려 있습니다. 2016년 도쿄도지사 선거에서는 11만 명 이상의 일본 시민들이 극우 배외주의자에게 표를 던졌습니다. 전후 한때 그 욕망은 부분적이고 형식적으로 봉인됐지만, 일단 봉인이 풀리자 ‘본심’이 풀려나왔습니다.
이런 우파·보수파의 ‘본심’에 대항해야 할 세력으로서의 리버럴파는 중간 지대에 안주하면서 시시각각 악화되는 상황을 멀리서 바라보며 방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들이 자신의 내면화된 국민주의와 계속되는 식민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한, 예전에 그랬듯이 지금도 또한 쉽게 ‘애매한 일본’ 품에 안겨 제어장치 없이 시류에 떠밀려갈 것입니다. --- p.152~153

타자에 대한 개인의 자발적인 헌신을 기대해도 좋다고 단언할 근거가 내게는 없다. 개인의 자발성에 맡겨두면 자연스레 세계는 더 좋아질 것이라고 낙관할 근거도 없다. 그러나 그것을 ‘위에서부터’의 이데올로기나 규범으로 정하는 순간, 개인의 자발적인 행위는 권력에 의해 횡령당하고 이용당한다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위험성에 최대한 민감하게 대처하려고 하는 것만이 국가주의에 저항하는 길이다.
인류사의 현 단계에서 우리는 아직 국가와의 연줄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국가는 당분간 우리의 세계에 계속 존재할 것이다. 그래도 국가의 전횡과 폭력을 막고, 인간 사회를 더 좋게 바꿔나가려면 개인의 존엄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 다양한 개인들의 자발적인 연대를 통해 국가를 견제해가는 수밖에 없다. --- p.201

나는 2016년 3월에 강연 등을 위해 코스타리카를 방문했다. 코스타리카는 작은 나라지만 지금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군대를 보유하지 않은 나라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헌법상으로는 무력--- p.군사력)을 보유하지 않는다고 선언한 나라지만, 그 규정은 현행 헌법 공포 뒤 몇 년 만에 형해화했다. 그러나 설령 내용 없는 원칙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그 원칙조차 팽개쳐버린 뒤에 무엇이 남아 있는가. 그 불안과 공포가, 형해화하긴 했지만 그래도 살아남은 평화주의를 유지시켜온 것이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자위대가 헌법 위반이라면 헌법을 바꿔 정식 군대로 만들자는 주장이 총리를 비롯해 주요 정치가들 입에서 공공연히 튀어나오게 됐다.
코스타리카에서 만난 교수와 학생들에게 “지금 세계적으로 비무장 국가는 명실공히 이 나라밖에 없네요”라며 얘기를 건넸더니 그들은 밝은 표정으로 앞으로도 어떻게든 비무장 원칙을 지켜가겠다고 답했다. 전 세계에 군사주의와 배외주의가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코스타리카 사람들은 언제까지 이 원칙을 지켜낼 수 있을까. 현대에 이렇게 무장하지 않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나라가 지구상에 단 하나라도 존재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 상상해본다. 희귀 동물의 절멸은 생태계의 파멸적 결과를 예고하는 것인데 이 작은 나라가 그 이상과 평화를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지, 거기에 인류 전체의 미래가 걸려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일본 국민은 헌법 9조를 지키면서 코스타리카 사람들과 연대하고, 나아가 전 세계에 평화주의를 보급해야 한다. 그것은 일본 국민이 자국의 전쟁으로 인한 모든 피해자와 사망자들에 대해 짊어지고 있는 채무이며 엄중한 사명이다. --- p.249~250

타국을 침공해 비전투원을 포함한 타자를 대랑 학살했다는 사실 앞에서 부끄러워할 수 있을까. 국가 정책으로 타민족 여성들에게 대규모로 계획적인 성적 착취를 자행했다는 사실 앞에서 부끄러워할 수 있을까. 전자에 대해 희생자 수를 운운하면서 책임을 부정하려는 사람들, 후자에 대해 국가에 법적 책임은 없으며, 책임은 업자들에게 있다는 따위의 주장을 늘어놓는 사람들은 부끄럽지 않은 것일까? 자신의 아버지, 상사나 동료, 이웃 사람이나 벗이 그런 행위에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가담했거나 수수방관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치욕감을 느끼지 않는 것일까?
아마도 치욕감 따위는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런 ‘원칙적인 감정’을 이미 저버렸다. ‘국제 연대’의 기초가 돼야 할 부끄러운 감정 자체가 없어졌거나 애초부터 그런 것 따위는 나눠 가질 수 없었던 것이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사실’을 얘기해봤자 그들은 이제 와서 새삼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인 것을 부끄러워한다”고 말해봤자 ‘인간’이라는 것에 대한 공통의 이해가 파괴돼버린 상태인 것이다. 그러나 국제 연대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먼저 이 ‘원칙적인 감정’을 되살려야 한다.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제부터라도 만들어내야 한다. 그것이 ‘문학’이 떠맡아야 할 임무다.
--- p.269~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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