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1994년의 전환기, 특히 1992년의 한반도는 평화정착을 위한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고 있었지만, 우리도, 미국도, 북한도 이 기회를 잡지 못했다. --- p. 11
북?중관계에서 동맹결속이 강화되느냐 또는 이완되느냐, 북?미관계에서 직접대화가 진전되느냐 또는 퇴행하느냐, 미?중관계에서 상호갈등이 심화되느냐 또는 상호협력이 확대되느냐에 따라 북?미?중 3국 간의 관계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사이에 있다. 즉, 북?미?중 3국은 ‘전략적 삼각관계’에 있으며, 북한의 대미 및 대중외교 행태를 설명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될 수 있다. --- p. 36
북한이 정권수립 후 40년 동안 의지해 온 동맹이 사라졌다. 북한의 핵우산이 없어졌으며, 북한의 위협인식 수준은 크게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 p. 59
무엇보다 중국 스스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면서 북한에 대해서는 「하나의 조선」 원칙을 포기하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할 것을 권고한 것이 당시 북?중동맹 운영의 실상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 p. 100
한국에게 ‘남·북간 핵문제 논의는 양날의 칼’이었다. 한반도 안보문제의 핵심인 주한미군핵무기 철수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연계하여 남북관계의 주도권을 확보한다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는가 하면, 핵무기 철수가 가져올 대북억지력 차원의 영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NPT사 허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래의 산업적 가치를 예측할 수 없는 재처리를 현 시점에서 포기해야 하는가라는 고려도 있었다. --- p. 115
뿐만 아니라, 양측은 핵사찰 문제에 진전이 있을 경우, 주한미군 2단계 철수를 재개하는 문제도 논의했다. 당시 한미 양국은 북한이 핵사찰을 수용토록 하기 위해서는 주한미군 재조정 계획에 신축성을 보일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 p. 126
가장 큰 문제는 변화를 거부하는 북한이었다. ‘우리식 사회주의의 우월성’을 포기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북방외교의 성과를 상쇄하고 미국에 접근하려는 의욕에서 남한을 넘어 미국에 접근하려고 했다. 남한은 한반도 문제 논의의 주도권에 집착하여 북?미관계가 남?북관계를 앞지를까봐 경계했다. 미국은 비확산정책의 시각에서만 북한을 보고 있었을 뿐, 북한과의 직접 협상을 통해 관계개선을 추구할 동인을 찾지 못했다.--- p. 156
북한이 북?미직접협상 구도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1994년 5-6월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전쟁 위기를 겪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로 양측은 전쟁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북한의 벼랑 끝 외교는 성공했다. --- p. 241
당시 미국은 어느 정도까지 전쟁을 실천적으로 준비하고 있었을까? 오버도퍼 기자는 양국 정부에서 정책결정체계에 가까이 있던 사람일수록 전쟁 발발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당시 한국의 지도자들은 전체적인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을까? (본분 226
무엇보다 북한은 모든 역량을 미국과의 협상에 집중했다. 북한은 1992년 후반 북·일국교정상화 교섭이 핵문제로 좌초하는 것을 보았다. IAEA 임시사찰을 통한 핵문제 해결 돌파 시도도 미국의 벽에 막혔다. 북한으로서는 미국과의 협상과 관계개선을 사활적인 요소로 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p. 239
김영삼 정부는 1994년 2-3월과 5-6월에 걸쳐 적어도 두 번이나 전쟁위기를 겪었고,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재확인했다. 남한은 전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 p. 242
북한에 대한 안보리 제재조치가 논의되고 한반도에 일촉즉발의 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1994년 6월 6-10일간 최광 북한 인민군 총참모장이 중국을 방문했다...... 장쩌민 총서기는 최광 면담에서 “피로 맺은 양국 관계를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중국의 흔들리지 않는 정책”임을 강조했다. --- p. 251
전체적으로 볼 때 중국은 북한 핵문제에 대응하는 미국의 선택지를 제한했으며, 결국 미국이 북한과 직접협상을 통한 해결의 길로 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 p. 278
북한이 갈구해 마지않던 미국과의 정책대화가 이루어진 것은 북한에 대한 미국의 압박에 중국의 전략적 이익이 저항한 결과였다. 북한은 핵확산이라는 미국의 이익을 건드렸고, 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중국이 제한했다. --- p. 285
중국은 한반도 비핵화를 지지하면서도 그 실현 방법은 어디까지나 대화와 협상이 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북한에 대한 국제적 대응조치의 상한선을 결정했다. --- p. 289
탈냉전 초기에 개혁개방의 길을 포기했기 때문에 북한은 동아시아의 역동적인 경제발전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지금까지도 그 기회를 잡지 못하고 있다. 그때 핵옵션을 남겼기 때문에 미국과 신뢰를 구축하지 못했고, 지금도 그 불신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 때 핵옵션을 남겼기 때문에 결국 핵무장의 길을 가게 되었고, 그 결과 북한의 고립은 지금까지 심화해 왔다. 지금 북한에게 제재는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다. 북한의 대외활동은 지금도 제재에 막혀있고, 남북교류와 경제협력도 제재 때문에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있다.
--- p.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