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을 만나는 것은 감각적인 즐거움의 욕망이면서 동시에 이미지를 통한 내밀한 사유의 욕망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아니라 이미지가 그렇게 욕망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중국 회화사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품들과 만난다는 것 또한 그러합니다. 그것은 이미지의 욕망 속에 숨 쉬고 있는, 그러나 오래 묵은 먼지로 덮여 있는 동아시아의 은밀한 체취와 쓸쓸한 고뇌와 신비스러운 사유의 미로를 헤매는 일입니다.-5쪽
북방(북송)의 웅장한 대관산수화는 여기에서 시작되고 여기에서 완성되었습니다. 이성의 경이로운 신품, 〈청만소사도〉를 이제 만나보아야 합니다. “허공의 푸른빛이 옷을 적신다”는 왕유의 시구처럼 아직 비의 푸른 비늘이 묻어 있을 듯한 청량한 늦가을의 대기, 골짜기가 피워내는 엷은 안개, 알 수 없는 어떤 무한의 내부처럼 열리는 이내[嵐] 속에 홀연히 솟은 장엄한 산봉우리와 우리는 직면해야 합니다. 비 개인 묏부리, ‘청만晴巒’이고요, 그 아래 언덕의 소슬한 사원, ‘소사蕭寺’입니다.-28쪽
가끔은 우리도 〈고사관록도〉의 선비처럼 쓸모없는 여백을 바라볼 일입니다. 더러는 그 속에서 오래도록 거닐어도 볼 일입니다. 이 여백 속에서 꽃은 꽃으로, 숲은 숲으로, 사람은 사람으로, 비로소 아름답게 빛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여백이 이 모든 형상과 향기와 빛깔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57쪽
조맹부 미학의 핵심 주제는 ‘고의古意(옛 사람의 정신)’입니다. 그것은 망국 남송의 사실적이고 기교적인 미학을 극복하고 남송 이전인 북송·당의 예술 정신과 그 웅건하고 질박한 양식으로의 회귀를 의미합니다. 〈작화추색도〉는 이러한 미학적 결의의 공간입니다. 문인인 주밀이 제남을 그리워한 것은 단지 조상의 땅이어서만이 아닙니다. 그곳이 또한 북송의 문학이 꽃핀 곳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조맹부가 예전의 고졸한 양식으로 제남의 풍경을 그려서 선물한 것은 노학자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한 선의를 넘어서 일종의 미학적 동맹의 표시가 아니었을까요.-63쪽
예술 애호가로 유명한 남당의 마지막 왕 이욱은 그의 운명과는 다른 정치적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선대의 중신을 지낸 한희재를 다시 재상으로 등용하여 국운을 중흥코자 했던 것이죠. 이 소식을 듣자 한희재는 방탕한 밤잔치를 열기 시작합니다. 왕은 한희재의 행태가 의심스러웠습니다. 그래서 화원의 화가인 고굉중을 시켜 한희재의 밤잔치를 몰래 염탐하고 그려오게 합니다. 고굉중이 몰래 잠입을 했는지 아니면 초대를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리하여 그려진 희대의 명작이 긴 두루마리의 〈한희재야연도〉입니다. 여기에는 한희재의 밤을 훔쳐보려는 이욱의 관음증도 유령처럼 언저리를 서성거리고 있습니다.-129쪽
〈청명상하도〉의 실재감은 장대한 경관에서뿐만 아니라 작고 세밀한 풍경에서도 탁월하게 성취되고 있습니다. 홍교 장면의 오른쪽 하단 골목길로 걸어 들어가보세요. 좁은 길을 무단으로 점유한 주점의 탁자, 그 위의 찢어진 일산日傘은 저잣거리의 뒷골목 풍경으로 얼마나 어울리는 사실적 묘사인가요.(그림 전체에서 찢어진 일산은 여기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옆 버드나무의 부러진 가지에서 사실성은 더욱 섬세해집니다.-144쪽
천지가 하얗게 눈에 덮인 겨울 계곡의 저 아득한 적막! 그러나 그 켜켜이 쌓인 적막을 밀어내면서 겨울의 풍경 속으로 성큼 들어가본다면 당신은 경악할지도 모릅니다. 설국의 고요 아래에 문득 날을 세운 사나운 바람이 계곡의 공기를 찢고, 한기寒氣를 움켜잡으려는 마른 가지들을 마구 헝클어놓습니다. 산과 바위들도 거칠게 주름을 흔듭니다. 명대 절파浙派의 절정기를 이끌었던 화가 오위의 〈답설심매도〉(눈을 밟으며 매화를 찾아다니다)입니다. -240쪽
〈마화지추림공화도〉(마화지가 가을 숲에서 벗과 함께 담소하다)는 건륭 24년(1759년), 김농의 나이 73세가 되던 가을에 그린 《산수인물도책》 가운데 한 장면(11엽)입니다. 가을 숲속을 두 선비가 소요하고 있습니다. 그중에 한 사람은 남송 시대 저명한 학자이자 화가였던 마화지입니다. 두 사람은 아주 친숙한 지인인 듯합니다. 무얼 가지고 알 수 있냐고요? 그야 분위기를 보면 금세 알지요. 의아한 표정 짓지 마세요. 이 그림은 진짜 분위기의 그림이랍니다. 이 그림에서 어떤 선도, 어떤 색채도, 어떤 형상도 자기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춤추는 나무도, 소슬한 바람을 품은 성긴 잎새도, 뒤돌아보는 이도, 등을 보이고 있는 이도, 모두 서로의 선과 색채와 형상에 스며들면서 맑고 담담한 가을 분위기가 되고 있습니다. 담채로 잘 번진 파스텔화처럼 말입니다. -289쪽
〈육시도〉의 구도는 한 순간의 느낌처럼 지극히 단순합니다. 그러나 그 속에 무궁한 변화가 숨 쉬고 있습니다. 여섯 개의 감은 조금씩 형태와 먹의 농도가 다릅니다. 먹의 농담은 과실을 맺게 한 햇살과 비와 바람의 오랜 시간을 머금고 있습니다. 감의 배치를 보세요. 일렬로 늘어선 다섯 개의 감은 상호 미묘한 차이를 품고 있습니다. 여기에 열에서 빠져나온 하나의 감이 그 미묘한 차이에 조형적 구도와 리듬감을 부여합니다. 그러나 간지러울 정도로 아주 살짝만입니다. 단순함 속에서 변화의 율동을 함축하는 목계의 붓은 예사의 공력이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매 순간 갖는 느낌의 구조가 본래 그러한 듯합니다. 단순한 느낌 속에 삶의 무수한 체험과 세계의 복잡한 변화가 농축되어 있습니다.-326쪽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