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주 일찌감치, 겨우 열 살이나 열한 살 무렵에 10만 파운드쯤 갖고 있지 않으면 행세하기 어렵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 하지만 내가 그런 천국으로 갈 수 있는 길은 결코 없으리라는 것 또한 분명했다. 그런 천국은 거기서 태어나지 않은 이상 진짜로 속할 수 없는 곳이었다. 어쩌다 ‘도시 진출’이라는 불가사의한 작전을 통해 돈을 번다 쳐도 10만 파운드를 벌어서 도시를 떠날 무렵이면 뚱뚱한 늙은이가 되어 있을 거다. 하지만 최상층이 정말로 부러운 이유는 젊을 때 이미 부자라는 거였다.
--- p.68
축구는 학교생활의 축소판이었다. 늘 강자가 약자에게 승리를 거뒀다. 미덕은 이기는 데 있었다. 즉, 미덕은 남들보다 더 크고, 더 강하고, 더 잘생기고, 더 부자고, 더 인기 많고, 더 품격 있고, 더 파렴치한 데 있었다. 달리 표현해서 남을 지배하고, 못살게 굴고, 고통을 주고, 바보로 만들고, 매사에 이기는 데 있었다. 삶이란 본디 층층이 위계가 있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옳은 일이었다. 강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이길 자격이 있었고, 그래서 늘 이겼다. 또 약자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져도 쌌고, 그래서 늘, 끊임없이 지기만 했다.
--- p.75~76
그리고 아이는 나이 드는 것을 끔찍한 재앙으로 여긴다. 신비한 섭리로 본인에게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아이가 보기에 서른이 넘은 사람들은 전부(적어도 아이가 보기에는) 쓸데없는 것들에 대해 끊임없이 떠들어대고, 살아가는 이유 없이 그저 살아 있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괴물들일 뿐이다. 아이가 보기에는 오직 아이의 삶만이 진짜 삶이다.
--- p.95
아이의 약점은 백지 상태에서 시작한다는 것이다. 아이는 자신이 사는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문시하지도 않는다. 또한 무엇이든 쉽게 믿기 때문에 남들에게 쉽게 휘둘린다. 남들의 농간으로 열등감에 쉽게 빠지고, 이해할 수 없고 가혹한 법을 어기는 데 대한 공포에 쉽게 물든다.
--- p.97~98
결국엔 내가 코끼리를 쏠 수밖에 없다는 걸 문득 깨달았다. 사람들이 내가 그렇게 하기를 기대하니 그렇게 해야 했다. 나를 앞으로 떠미는 2천 명의 의지가 느껴졌다. 거역할 수 없는 힘이었다. 두 손으로 소총을 들고 서 있던 나는 백인의 동양 지배라는 것이 얼마나 공허하고 헛된 것인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총을 든 백인인 내가 무장하지 않은 원주민 무리 앞에 서 있었다. 겉보기에는 내가 연극의 주인공이었지만, 실제로는 뒤에 있는 노란 얼굴들의 의지에 이리저리 떠밀리는 우스꽝스러운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았다.
--- p.110~111
우리 시대 같은 시대에 정치적 주제의 글쓰기를 피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느껴진다. 모두가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 주제들에 대해 쓰고 있다. 단지 어느 쪽을 편드는지, 어느 접근법을 따르는지의 문제일 뿐이다.
--- p.130
사람들이 처절한 정치 투쟁에 삶을 바치고, 내전에서 죽임을 당하고, 게슈타포의 비밀감옥에서 고문당하는 것은, 중앙난방과 냉방장치와 형광등이 있는 천국을 건설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인류가 서로를 착취하고 죽이는 대신 서로를 사랑하는 세상을 원해서다.
--- p.168
하지만 이 살인사건이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한 건 ‘개미귀신’이라 불린 독일 폭탄과 프랑스 전황에 대한 불안감이 높아지던 시기에 국민의 관심을 딴 데로 돌리기 위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존스와 헐튼이 범행을 저지르던 때는 V1의 공습 무렵, 이들에게 유죄 판결이 내려진 때는 V2의 공습 무렵이었다.
--- p.1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