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항상 불편함을 마주하는 파이어니어로서 사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제 도전을 가로막고 충돌하며 다시 시도하게 하는 이 모든 경험은 제 소명을 이해하도록 돕는 긍정적인 자극이라고 여기려 합니다. 더 크고, 더 좋은 것을 향해 옮겨가려는 ‘경력 지향적’ 사역자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가 제 장점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단지 더 큰 무언가를 운영하기보다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에 열정을 갖고 있을 뿐입니다. 작게 시작하는 것도, 주변부에서 일하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오히려 주변부에서 얻는 자유를 좋아합니다. … 걱정이 쌓이기도 합니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교회의 비전에 이미 젊은 세대가 떠나버린, 내 또래 세대들만이 남아있는 이 교회가 굶주려 있다는 망상에 빠져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저는 포기하지 못했고, 여전히 새로운 길을 걸어가려 합니다. 개인의 고민과 학계의 탐구가 서로 엮여 새로운 길을 그려낼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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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는 아마 ‘수치심의 시대’라고 표현하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근대 사회학 이론가들이 옳다면 우리는 자의식에 과도하게 매달리고, 자기 자신만을 성찰하는 시대에 도달했습니다. 개인은 전통적 구조와 관계로부터 분리되었습니다. 전통적인 역할과 기대, 규범은 이들을 떠받치는 실천과 의식ritual과 함께 추락해버렸습니다. 고정된 규칙에 수반되는 죄의식은 수치심보다 덜 중요해졌다. 수치심은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에서 자아에 대한 불확실성과 동행합니다. 이들의 말이 옳고 우리가 수치심이라는 거대한 문제를 갖고 있다면, 성서는 이 주제에 대해 무엇이라 말하며 예수님의 구원사역은 어떻게 이 시대에 희망과 평화를 불러올 수 있을까요?.
--- p.106~107
사람들이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도록 돕고, 공동체 안에서 사랑과 용서를 깨닫도록 하는 복음을 전하려 애쓴다면, 그리스도교는 포스트모던한 이 시대에 다시 적절성을 회복하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수치심에 기반한 이 세계에 살면서 복음을 실천하고, 저항에 직면하며, 우리의 열망을 진정성 있게 반영하는 일은 쉽지 않은 도전입니다. 목적을 달성하기에 우리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저는 교회의 새로운 표현이 교회를 사람들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사람들의 내적인 화해와 서로에 대한 용서가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어주기를, 더 나아가 사회의 변혁을 이끌어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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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집에서 1마일쯤 떨어진 곳에는 자그마한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는 복잡한 도로 바로 옆에 자리 잡고 있는데, 자동차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교회 게시판을 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화려한 색이 칠해진 포스터 2개가 게시판에 붙어 있었습니다. 둘 다 흠정역 성서 구절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왼쪽 포스터에는 녹색 바탕에 노란색 글씨로 “그 죄가 너희 덜미를 잡으리라”(민수 32:33)가, 오른쪽 포스터에는 노란색 바탕에 녹색 글씨로 “오, 하느님 죄 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루가 18:23)라는 구절이 적혀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구절들을 읽으며 어떤 생각을 할까요? 분명 교회 구성원들은 행인들이 스스로가 죄인임을 깨닫는 게 중요하며, 그들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묻고 싶습니다. 21세기 영국에 사는 사람 중에 자신이 용서가 필요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보통 사람들을 죄인이라 주장하는 이 문구에 행인들은 어떻게 반응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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