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 중세의 기사도는 조선의 선비가 사는 법과 상당한 유사점이 있었다. 기사든 선비든 그들은 명예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겼다. 책임감도 투철했다. 선비도 끝까지 약속을 지키려 했고, 사회적 약자를 보살피는 데 마음을 썼다. 또 목숨을 바쳐서라도 나라를 구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었다. 선비의 무기는 칼이 아니라 붓이었다. 또 선비는 기독교와 같은 종교기관에 복종하지 않았다. 선비는 성리학(유교)의 이념에 충성을 바쳤다. 서양의 기사는 사람에게 충성을 바쳤다. 기사는 자신이 섬기는 영주(왕, 주교 포함)의 명령에 철저히 복종했다. 조선의 선비는 그렇지 않았다. 도리에 어긋난 왕명을 거역하고, 왕과 국가의 잘못된 결정에 반대하는 것이 선비의 충성으로 이해될 경우가 많았다. 선비는 명령권을 가진 이에게 순종하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천명(天命)에 따라 백성을 돌보고, 인과 예의 가치를 수호하며, 종묘사직의 안녕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하는 사람이었다. 서양의 기사가 현실 권력에 절대복종한 것과 달리, 선비는 도덕과 이념에 헌신했다.---p.28~29
1931년 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켜 북중국 일대를 강제 점령했다. 그러자 니토베 이나조라는 식민사학자는 유창한 영어 실력을 바탕으로 일본의 침략행위를 적극적으로 변호했다. 그는 일본의 전통문화를 널리 선전할 목적으로 『부시도! 일본 정신』이라는 책을 간행했다. 그가 이 책을 쓴 동기는, 일본의 고유한 윤리와 도덕을 강조함으로써 문화국가 일본의 위상을 높이는 것이었다. 서양이 기독교 중심으로 윤리의식을 발전시켜온 것과 달리, 일본에서는 사무라이 특유의 도덕관념이 발전했다. 이렇게 선전하는 것이 그의 저술 목적이었다. 결과적으로 그는 성공했다. ‘일본에는 서양 중세의 기사도를 무색하게 하는 무사중심의 고급문화가 존재하였다.’ 니토베는 서구의 지식인 사회를 이렇게 믿도록 만들었다.---p.59~60
니토베는 사무라이를 도덕적 존재로 부각시켰다. 의(義), 용(勇), 인(仁), 예(禮), 성(誠), 충(忠)의 도덕적 덕목으로 철저히 무장한 존재였다는 것이다. 사무라이의 고유문화로 정착한 할복의 경우에서 보듯, 죽음마저 두려움 없이 받아들이는 사무라이의 태도는 누구라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숭고함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니토베의 책이 간행되자 많은 서구인들이 일본 정신의 독특한 미학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며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일본인들의 자긍심은 더욱 높아졌다. 내가 보기에, 사무라이의 미덕에 대한 일본 사회의 자화자찬은 지나쳤다.---p.60~61
19세기 후반에는 학교 교육 전반에 걸쳐 신사도의 실천이 강조되었다. 인문사회교과의 모든 영역에서 신사의 교양과 미덕을 가르쳤다. 그때 유럽에서 신사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강조한 교과목은 체육이었다. 공사립학교를 막론하고 체육을 통해 신사도를 생활 속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사회적 열망이 강렬했다. 그 흔적이 아직도 감지된다. 이른바 ‘스포츠맨십’이라는 것이 교육 현장에서 늘 강조된다. ---p.101
본래 서구의 왕실과 귀족계급은 격조 높고 복잡한 전통예절을 고안했다. 근대사회의 주역인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취향에 걸맞게 기존 예법을 하나씩 뜯어고쳤다. 그러고는 학교와 가정, 그리고 사회생활을 통해 새 예절을 사회 전반에 퍼뜨렸다.
교양을 중시하는 시민이라면 항상 예의 바르게 행동해야 했다. 그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상류사회의 전통을 실용적으로 개혁했다. 근대사회의 지배권을 행사한 것은 부르주아지였다. 그런데 그들의 가치관과 행동양식은 전통귀족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대부분이었다. 신사도는 근대사회를 거쳐 현대의 시민사회에서도 유효한 측면이 적지 않다. ---p.116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선비들은 지나치게 추상적인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다. 또 자연과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체계적, 분석적으로 접근하지 못했다고 비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조선의 선비들에게는 현대인에게 결핍된 많은 미덕이 있었다. 그들은 물질적 욕망을 절제하는 청아한 인품을 가졌고, 겸손했다.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고, 끊임없이 서로 배우고 가르쳤다. 자연의 고마움을 알았고,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함부로 착취하지도 않았다. 선비들에게 인간의 삶은 천지자연의 일부였다. 인간은 결코 자연적 질서의 파괴자가 아니었다. 자연과 하나 되기를 바랐던 그들의 꿈을, 우리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망각한 채 살았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문화적 자산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p.184
조선시대에는 선비 중심의 평화롭고, 질서 있는 목가적 사회질서가 유지되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은 문화로부터 소외된 변경처럼 보였으나, 실제는 그렇지 않았다. 서울에서 수백 리 떨어진 마을이 성리학 문화의 주된 산실이었다. 이황, 조식, 김인후, 서경덕 등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석학들의 주된 활동무대는 먼 시골의 한적한 마을이었다. ---p.260
조선이 망하고 세월이 한참 흐른 뒤에도 마을의 인심과 질서는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총독부를 통해 한반도의 정치적·경제적·문화적 권력을 거머쥐면, 단 기간 내에 ‘내선일치(內鮮一致)’가 달성될 줄로 기대했다. 그러나 35년의 폭압과 갖은 횡포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마을은 문화적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무자비한 일제 말기의 징병, 징용, 위안부를 비롯한 강제동원을 겪은 뒤에야 마을에 평화가 사라졌다. 그럼에도 마을의 순기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을을 토대로 한국인은 고유한 전통문화를 지켜냈다. 마을 사람들의 전통가치관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이것은 실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을 선언하자, 조상 전래의 언어는 물론이고 고유의 전통과 관습이 단시일 내에 완벽하게 복구되었다. 마을에는 선비들이 500년 동안 정성으로 심고 가꾼 성리학 문화가 살아 숨 쉬었다. 이웃을 존중하고, 조상과 부모를 공경하며, 처자를 제 몸보다 사랑하는 전통의 뿌리가 깊었다. 어지간한 외부의 충격에는 끄덕하지 않는 내적 견고함이 있었다. 목소리를 높여 유교 경전을 읽고 외는 선비는 거의 사라졌으나, 마을의 공기를 지배하는 성리학의 가르침은 미풍양속이란 이름으로 생생히 살아 있었다. 이것이 조선의 문화유산이었다. ---p.261
오직 붓과 책만 숭상하던 선비였다. 또 그들의 교화로 순후한 인심을 자랑하던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외적이 침입하여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워지자, 그들은 서로 손을 잡고 의병이 되어 분연히 일어섰다. 목숨을 아끼지 않고 최후의 순간까지 투쟁을 전개했다. 그들의 비상한 의기와 애국심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만약에 그들이 성리학의 가르침을 몰랐어도 이런 운동이 가능했을까. 서당이 없었어도, 문자를 몰랐어도 이처럼 의로운 행동이 일어났을까. ---p.273
의병운동에 투신하는 것은 목숨을 버릴 각오와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리는 큰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생사를 건 비장한 결심이었다. 어찌 선비들만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그들의 곁에는 생사를 함께 한 마을 사람들이 있었다. 조선 사회의 참 모습이 여실히 드러난 장면이었다.
선비로 형상화된 양심적 지식인은 제 한 몸의 지조를 지킬 뿐만이 아니다. 그에게 감화된 무수한 이웃들까지도 의인(義人)으로 바꿔놓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한국 사회에서는 민주화가 성공적으로 진행되었다. 독재권력의 무자비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 땅에는 꿋꿋한 지식인들이 많았다. 그들과 뜻을 함께 하여 행동으로 연대하는 시민들도 많았다. 모두가 거센 저항운동으로 폭력적인 독재정권에 맞서 싸웠다.
그간의 시민운동을 이렇게 관련짓는 것은 지나치게 단순하고 편의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지식인과 시민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왜곡된 역사 흐름을 바로잡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그 사이 성리학은 거의 명맥이 끊어졌고, 갓 쓴 선비는 주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마을과 서당을 중심으로 펼쳐진 선비들의 사회문화적 활동도 끝이 났다. 의병운동은 그 마지막 불꽃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조선 선비의 전통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것이 아닐까. 그것이 이렇게 살아남아서 현대 한국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p.2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