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에게 유대와 이방은 서로 대립되는 세계이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속했던 두 세계를 대립적으로 생각하지 않으며, 하나를 선택하고 하나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두 세계를 아우를 수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추구하며 자신의 복음 안에서 그것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21세기에 옛 사람 바울을 다시 불러내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정치와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종교와 문명이 대립과 갈등의 중심에 자리 잡은 이 시기에, 거대담론들의 가치와 관심이 수그러들고 상대적인 진리와 자신들만의 정당성이 지지되는 이 시기에, 서로 다른 것들을 아우르며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대립을 보다 더 큰 관점에서 해결하려는 바울의 노력이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기 때문이다. (6쪽)
틀림과 다름의 혼란, 일방성과 획일성의 폭력, 바울은 그것들과 싸워야 했고, 그것들이 건네는 고난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러므로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삶과 고난은 동전의 양면처럼 늘 함께한다. 그러나 바울은 늘 그 고난을 자랑하며 고난을 사도의 징표로 강조한다. 고난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하시며 그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자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난은 고통을 수반하지만, 그것은 단순히 고통의 상흔만을 남기지 않았다. (31쪽)
바울은, 진정한 자유란 그리스도에 속함으로써 비로소 주어진다고 생각한다. 아담과 같은 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그리스도가 오기 전까지 아담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처럼,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았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존재를 변화시킨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인간을 아담에게서 그리스도로 옮기며, 그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로서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 ‘종’이라는 개념이 구속(拘束)과 부자유(不自由)와 결부되어 있지만, 바울의 자유는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는 것은 진정한 자유를 얻는 것이다. (59쪽)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사랑, 예수에게 적용된 사랑은 아가페(agape)라는 단어이다. 아가페는 1세기에는 매우 드문 단어로서, 그리스도교의 사랑을 나타내는 특별한 단어이다. 아가페는, 다른 방식으로는 전혀 사랑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대상에게 가치를 부여하는 사랑을 의미한다. 즉,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란, 에로스의 사랑을 느끼게 하는 가치나 매력이 없을 뿐 아니라, 필리아의 사랑을 받을 만큼 즐거움을 주지도 못하는 존재이다. (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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