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청년의사는 환자와 눈이 마주치면 큰일이라도 나는 듯, 눈도 안 마주치고 할 말만 하고 휙 돌아서는 그런 쌀쌀맞은 의사가 아니었습니다. 많이 아프시냐고 묻기도 하고, 빨리 처치를 못 해줘서 미안하다고 웃어주기도 하고, 간호하는 아들이 잘생겼다고 덕담도 해주었습니다. 청년의사는 입원 첫날부터 한밤중이면 살며시 찾아와 환자의 침대 곁에서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청년의사는 글을 잘 썼습니다. 의대생 시절부터 ‘스티그마’란 ID로 신앙과 음악과 책에 관한 글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올곧은 신앙의 자세가 드러난 글들은 온라인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젊은 의사와 환자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차가운 의술 속 따뜻한 인술로 잔잔한 감동을 주었습니다. 2004년에는 신문 ‘청년의사’ 주최 한미수필문학상 공모에서 ‘개입’이란 글로 대상을 받았습니다.
청년의사는 자기 것을 아끼지 않고 나누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 필요하다면 자기 시간을 내주었습니다. 누군가 필요하다면 찬양 테이프와 신앙서적을 선뜻 선물했습니다. 그가 메고 다니던 검은 가방 속에서는 마르지 않는 샘처럼 책과 음반이 쏟아져 나와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졌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그의 사랑은 사람들을 하나님 앞으로 한 발 한 발 다가가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피도 나누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한 헌혈이 30회가 넘었습니다. 적십자에서 주는 헌혈유공장 은장을 받았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 사실을 몰랐습니다.
-제1장 ‘그 청년 바보의사’ 중에서
내과 4년 차인 선배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나는 내과주치의를 하면서 약 쓴다고 환자가 좋아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았어. 아프고 힘들다고 할 때 한 번 더 찾아가보고 한 번 더 어루만져주고 한 번 더 위로해줄 때 확실히 환자의 회복이 빨라.” 몸이 너무나 피곤한 순간에 울리는 호출 삐삐소리, 환자 보호자의 이런저런 요구들, 스태프 선생님들의 지시 등이 때론 견디기 어려움을 고백한다. 하지만 선배와 설대위 선교사님의 말이 ‘구두 속의 돌멩이’처럼 내 발을 아프게 한다. 결국 다시 몸을 추스르고 일어난다. 하나님께서 그 일들을 감당할 힘을 주시리라 기대하면서…….
-제2장 ‘홀로 남은 의사’ 중에서
우린 믿는 자의 모임 안에서는 ‘착하고 충성된 종’일 수 있지만, 바깥에 나가면 도움이 필요한 ‘작은 자’를 무시하고 지나치는 ‘바쁘고 악한’ 종교인이 될 수도 있다. 누구를 위한 분주함이며 누구를 위한 사역일까? 우린 더 이상 교회 안의 친한 크리스천들끼리만 상대하고 교제하는 영적인 도색(桃色)을 그쳐야 한다.
나는 ‘스티그마’ 성경공부 팀의 헌신적이었던 선배들을 통해 희생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접하게 된 한 명의 ‘작은 자’였다. 그 사랑을 만난 사람으로서 그 사랑을 더욱 전하고 싶다. 그 사랑이 더욱 커지게 하고 싶다.
-제5장 ‘외로운 양치기’ 중에서
그래도 젊은 날에 내가 기쁨으로 바랐던 일들을 맘껏 해볼 수 있었고, 그 일들이 다른 사람에게 미력하나마 도움이 되는 역할을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흐뭇하다. 이제 ‘아마추어’로서 조용히 내 관심영역을 누리면서, 의사라는 ‘프로’영역에서 내 역량을 준비해가야 할 것 같다. 그 외적인 모습이 의료의 현장이든, 예배의 현장이든, 모든 것이 늘 주님을 선택하는 삶이라는 것은 동일한 진리다.
-제6장 ‘그분을 위한 노래’ 중에서
2008년 5월쯤, 한 신실했던 청년이 남긴 글을 엮어달라는 제의를 받았습니다. 작가인 저는 그 청년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 들어가보았습니다. 그리고 미니홈피를 가득 채운 수많은 추모 글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현 형이 중환자실에 누워 있다는 글, 헌혈증이 필요하다는 글, 제발 툭툭 털고 일어나라는 글, 그리고 기도, 기도, 기도들. 33세, 군의관으로 복무 중에 유행성출혈열에 감염되어 소천했다는 그 청년과의 예기치 못한 대면이었습니다. 그의 글들을 하나하나 읽었습니다. 깊은 영성과 지성, 만만치 않은 글 솜씨, 그리고 약자와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본능적으로 다가가는 의사와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마음,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쓰는 청년의 순수함이 느껴졌습니다..
그 청년이 완벽한 인격은 아니었습니다. 수줍고 외로운 성격에 크리스천다운 모범을 보이려 애쓰느라 남을 불편하게 하고 갈등을 일으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추억하는 사람들 마음에는 그의 허물은 사라지고 그의 사랑만이 남겨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청년의 삶을 엮으면서 배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역시 우리가 어떤 대단한 일을 이루었는가보다는 살아가면서 얼마나 사랑했으며, 얼마나 타인을 배려했으며,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얼마나 분투했는지에 주목하실 거라는 것을.
-제10장. ‘그의 사랑은 진행 중’ 중에서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