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년 소설 수업에서 발표한 그녀의 소설은 아주 특별했다. 제목은 ‘우물’이었다. 합평 수업에선 여러 악평이 나왔다. “이게 소설인지 잘 모르겠어요!” 어떤 학생은 지적했다. 반은 옳고 반은 틀린 지적이었다. 그녀의 소설은 그녀만 쓸 수 있는 소설로서, 몽환의 덩어리였다. 보편성에 길들여진 시선으로 보면 일종의 암호 책 같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소설이 암호 책이면 왜 안 된단 말인가. 분명한 것은 ‘우물’을 읽은 모든 독자들이 어떤 불안한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동료들의 질문에 오로지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그녀가 소통을 거부하고 있다는 걸 그래서 나는 금방 알아차렸다. “작가가 되고 싶니?” 내가 물었고 그녀는 명쾌히 대답했다. “아뇨. 그냥, 시집이나 가고 싶어요!” 웃어야 할 대답인데 아무도 웃지 않았다. 수업은 그렇게 끝났다.
‘몸짓’으로부터 빠져나온 ㄱ이, 구체성을 획득하며 무한대로 확장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재직하고 있던 대학교수직을 그만두고 내가 혼자 이곳으로 내려온 것이 벌써 2년여 전이다. 가난한 밥상, 쓸쓸한 배회가 이곳에서 내가 사는 법이다. 그런데 쓸쓸했던 호숫가 나의 외딴집이 돌연 그 무언가로 가득 차는 듯한 느낌이 나를 사로잡는다. ‘시멘트 데드마스크’ 때문일 게다. 저 홀로 가득 차고 저 홀로 따뜻이 비어 있는 여기, 호숫가 나의 집.
이야기란 그렇다. 존재의 비밀스럽고 고유한 홀림 속으로 킬러처럼 소리 없이 걸어 들어가기.
‘섹스’가 아니라, ‘덩어리’다.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다. 나-그는 때로 ‘덩어리’가 된다. 나-그 사이의 정적, 나-그의 몸뚱어리 속 가시가 훼손되지 않도록 하자는데 암묵적인 동의를 전제한 ‘덩어리 되기’였다고 생각한다. 소유하지 않고 덩어리를 이루는 법을 우리는 알고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덩어리로 인한 어떤 소음도 발생하지 않는다. 피차 생의 가시를 촘촘히 내장하고 있었으므로.
ㄷ이 들어오기까지, 내가 ㄴ과 단둘이 지낸 것은 한 달 남짓이다.
그 사이 그와 내가 ‘멍청한 자유’로 맺어진 건 사실이지만, 한 침대에서 잠든 적은 없다. 덩어리에서 풀려나면 그는 아래층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다. “좋은 꿈꿀 거예요.” 그는 속삭인다. “좋은 꿈 꾸세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정물처럼 나는 누워 있다. 그가 이불을 끌어당겨 내 알몸을 꼼꼼히 덮어준다. 그의 입술이 내 이마에 가만히 앉았다가 떠나는 게 다음 순서다.
그가 언제나 섹스의 뒤처리를 깔끔하게 해주었으므로 나는 그 상태 그대로 잠들면 된다. 그는 벗어놓았던 자신의 옷가지들을 주워 가슴에 포개어 안은 채 문을 열고 나간다. 눈을 감고도 나는 그가 층계를 내려가는 걸 볼 수 있다. 층계는 어스레하다. 그는 거의 발소리를 내지 않는다.
그가 쓰는 아래층과 내가 쓰는 이층 사이엔 열아홉 개의 계단이 있다. 그는 발소리를 거의 내지 않지만 하나, 둘, 셋 하고 나는 입 속으로 그의 발걸음을 센다. 열아홉 번째에서 비로소 쿵 하고 거실마루를 딛는 발소리가 난다. “좋은 꿈 꿀 거예요.” 그의 목소리가 환청으로 그 순간 다시 들린다. 눈물이 핑 돌 때도 더러 있다. 따라 내려가고 싶다. 이런 정적 속에서 가속적으로 늙으며 살았는데 왜 쌓인 욕망의 더께가 없겠는가. 그러나 바로 그럴 때, 더블백이 떠오른다. 매듭이 잘 맺어져 언제나 그의 머리맡에 놓여 있는 그 더블백.
덩어리질 때, 나는 가끔 ㄴ을 투명 인간처럼 느낀다.
가령 남자1과의 ‘섹스’는 늘 진군의 나팔 소리를 따른다. 남자1은 무찔러오고 나는 결정적인 상처를 피하려고 최대한 나의 감각 기관을 오그린다. 그런데 ㄴ과의 ‘덩어리 되기’는 향기처럼 스민다. 나가면 내가 나간 것만큼 부드럽게 구부러지고, 솟으면 내가 솟은 것만큼 가볍게 그는 상승한다. 세심한 배려 때문인지 감각의 유연한 조절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그때쯤 당신의 눈가가 젖어들기 시작했어요. 당신이 왜 울었는지는 지금도 모르지만 충분히 이해하고 동의할 수는 있었어요. 내 가슴 속에도 눈보라가 막 휘날리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혀로 당신의 눈물을 가만히 닦아주었어요. 우리를 내려다보면서 그 순간 그녀가 한 말을 잊을 수가 없어요. 당신 위에 엎드린 내 날개를 떨리는 손으로 가볍게 만지다 말고, 그녀가 당신보다 눈물 젖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어요.
“자기들끼리만…너무해요….”
그녀의 말이 단순히 우리에게만 들으라고 한 말이었을까, 하고 나는 가끔 생각해봐요. “자기들끼리만…너무해요….” “자기들끼리만…너무해요…” “자기들끼리만…너무해요…” 위의 하나는 ㄷ이, 다른 하나는 당신이, 또 다른 하나는 내가 하는 말이라는 것으로 이해해주세요. 우물을 파고 있을 때, 트럭들이 구소소 낮은 지붕들을 무너뜨릴세라 질주하는 걸 내려다볼 때, 전문학교 뒷담을 따라 도열한 히말라야시다의 그늘이 내게로 진군해온다고 느낄 때, 나는 언제나 속으로 중얼거렸답니다. “자기들끼리만…너무해요….” 그렇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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