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의 언어체계를 관통하는 원리로서는, 그가 구사하는 일심一心, 화쟁和諍, 무애無碍, 회통會通, 화회和會 등의 용어가 자주 거론된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중 어느 말을 잡아도 원효사상의 면모가 적절히 드러난다. 어느 면모에 가중치를 두느냐에 따라 선호가 갈리지만, 어느 하나를 택하여도 다른 면모들이 빠져나가지는 않는다. 원효사상의 특징이 여기에 있다. 원효가 펼치는 다채로운 통찰과 언어는 ‘서로를 향해 열려 있고’, ‘서로를 껴안아 들이는 면모’가 특히 뚜렷하다. 그의 사상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원효사상은 단연 ‘통섭通攝’적이다. 열려 있기에 ‘서로 통하고’(通), 걸림 없이 받아들이고 또 들어가기에 ‘서로 껴안는다’(攝). 그래서 필자는 원효철학을 관통하고 또 포괄할 수 있는 개념으로 주저 없이 ‘통섭通攝’(서로 통하고 서로를 받아들임)을 선택한다. 화쟁和諍이나 일심一心 등은 모두 원효의 통섭학을 직조해 내는 소재들이다. --- p.23~24
원효의 언어를 원전형태로 재구사하면서 이리저리 조합하고 분석하는 교학적 독법으로는 통섭의 길을 만나기 어렵다. 불교학 전반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원효연구를 비롯한 불교연구는 이제 문헌학과 교학의 방법론적 관행과 내용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문헌학/교학의 성과를 품으면서도 오늘의 관심과 현재어로 자유롭게 재성찰하는 ‘성찰적 탐구’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응용불교나 비교철학적 격의格義불교가 ‘성찰 불교학’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그 한계가 명백하다. 전통교학이 확보한 해석학적 권위에 주눅 들지 않는 기백과 역량 계발이 수반해야 가능한 일이다. --- p.26
흥미로운 것은, 원효야말로 이러한 ‘성찰적 불교탐구’의 주목할 만한 모범이라는 점이다. 원효는, 접할 수 있었던 모든 불교문헌과 교학을 정밀하게 탐구하면서도 결코 능동적 성찰의 끈을 놓지 않는다. 또 자신의 실존적 갈증과 무관한 메마른 사변에 몰두하지 않는다. 그리고 성찰적 탐구의 성과를 그 시대의 현재어에 담아 정밀하게 펼친다. 그는, 지적 성취로 우쭐대려는 현학적 지성도 아니고, 중심부 지식을 조금 익혀와 행세하려는 주변부 지성도 아니며, 권력에 비위 맞추며 기생하려는 노예 지성도 아니다. 그는 당당한 태도로 자유롭게 성찰하였고, 치열하게 실험하였으며, 거칠게 자기를 검증하였다. --- p.26~27
원효의 언어에 담긴 통찰은 붓다와 대화하는 데 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인간에 의해 수립된 ‘인문적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원점 수준에서부터 문제를 다루게 해 준다. 개인적 소견으로는, 붓다와 대화하려면 결국 ‘차이 현상들을 다루는 인간의 방식’에 관한 그의 통찰을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원효의 관심과 통찰 역시 이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그런 점에서 붓다와 원효는 ‘인문人文의 근원적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이며, ‘지금 여기에서의 인문학적 보편과제’와 직결된다. 붓다와 원효의 언어가 지니는 이 인문학적 의미를 현재언어에 담아내는 일은 흥미진진하고 유익한 미답의 영역이다. 원효의 언어는 끝없이 현재로 귀환하면서 펄펄 살아 움직이는 ‘보편성찰의 보물창고’이다. 그 보고寶庫의 문을 여는 역량과 기술을 확보하는 것은 지금 학인들의 몫이다. 이번의 원효전서 번역본이 그 역량의 개발과 기술 연마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p.45
한국인문학의 숙원과제는 자생인문학의 형성이다. 최근 100여 년간 서구인문학의 성과를 열정적으로 소화해 온 한국인문학은 그간에 축적한 역량으로 자생인문학을 수립할 수 있는 조건들을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를 토양으로 삼아 고유성을 확보한 인문학을 자생인문학이라 한다면, 한국의 자생인문학은 한반도 지성의 과거가 반영된 내재적 모델을 갖추어야 고유의 정체성과 생명력을 확보할 수 있다. 원효학이 주목되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효학은 자생인문학의 내재적 모델을 수립하기 위한 최적의 의지처로 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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