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되고 부끄러운 행동을 한 인물을 비판하였는데 그가 자신과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이 가까운 사람이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를 지탄한 죄책감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 현실의 부조리, 운명에 대한 회의 속에서 처자식을 둔 채 부평초처럼 떠도는 인생살이를 선택하고 만다. 김병연의 고뇌와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을 십분 이해하면서도 그로 인해 김병연의 가족들이 평생을 두고 겪었을 외로움과 힘들었을 일상을 생각하면 안타깝기만 하다. 정착하지 않는 방랑 생활을 끝까지 고집하였지만 김병연에게 고향은 항상 가고 싶은 마음의 안식처였다. 사십 평생을 떠돌던 그도 결국 가족의 품이 그리웠는지 허허로움이 가득한 「자탄自歎」이란 시를 남겼다. --- 난세를 타계하려던 홍경래의 야망 中에서
다복동은 가산과 박천 두 군 사이에 있는 요지로서 그리 크지는 않으나 사방에 울창한 삼림이 우거진 산이 있어서 밖에서는 쉽사리 그 속을 염탐할 수 없는 비경秘境이었다. 산 너머 한 옆으로는 한양과 의주로 통하는 큰 길이 있고 앞으로는 대령강大寧江이 흘러서 수륙의 교통이 두루 좋았다. 홍경래는 전국을 널리 답사하였지만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없었다. 이곳은 가산, 박천, 태천, 곽산, 정주, 선천, 철산, 영변, 안주 등 여러 고을의 세력을 일시에 규합할 수 있는 곳이었으며 북으로 의주, 남으로는 한양을 향해 양군을 진격시킬 수가 있었다. 그리고 군사 훈련은 물론 무기의 제조와 군량을 수송하고 저장함에 있어 남의 눈을 피해 그 비밀을 가급적 오래 지킬 수가 있는 곳이다. 홍경래는 드디어 그동안 10년에 걸쳐 각 지방에 만들어 놓은 심복 책임자들을 소집하는 한편 군사 훈련을 맹렬히 하니 이윽고 그 무리가 2천에 이르러 위세를 떨치게 되었다. --- 고통 받던 백성들이 봉기하다 中 에서
싸움은 막바지의 치열한 경지로 불을 뿜었고, 최후의 날이 온 것을 안 홍경래는 급히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다시 거사할 사람은 살아남아야 하니 총참모 우군칙과 도총都摠 이희저는 어서 북으로 달아나 후일을 기약할 것을 명하였고, 이 말을 들은 우군칙은 이의를 제기하며 홍경래도 함께 달아나 재기를 기약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홍경래는 “내가 지금 살기를 기약한다면 서북 사람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소. 어서 북으로 도망하여 우리 일이 여기서 끝나지 않도록 하시오.” 명령하고 나서 어지러운 싸움터로 뛰어들었다. 옥쇄玉碎를 각오한 홍경래가 맹렬히 지휘하고 있을 때 적탄이 날아와 그의 가슴에 명중하였다. 그가 피를 뿜으며 쓰러지자 독전하던 선봉장 홍이팔이 달려와 붙들었으나 “…… 살아서 부디 후일을 기하라.” 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 최후를 맞이하는 홍경래군 中에서
한편 묘당廟堂에서는 연일 의정 대신들이 모여 계속되는 가뭄과 홍수의 대책을 강구하였다. 이 자리에서 영의정 김재찬은 가뭄에 대한 대책으로 모를 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농민들이 이앙移秧을 많이 하는 까닭에 가뭄의 피해가 심해지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나라 농민들은 이앙을 하지 않고 볍씨를 봄에 논밭에다 직접 뿌려서 그것을 그대로 가꾸어 추수하였습니다. 즉 건파乾播를 한 것이오. 이 건파는 비가 아니 와도 죽지 않고 내성이 강하여 잘되는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이른바 건답 직파乾畓直播 재배를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영농의 발전을 퇴화시키는 소리였다. 김재찬은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고 건파를 장려케 하라고 고집하였고, 조정에서는 가뭄에 대비하여 건파를 장려하라는 명령이 각 지방으로 내려갔다. 농민들은 이 소리에 콧방귀를 뀌었다. 난세를 타계하려던 홍경래의 야망 --- 백성의 삶에 오불관언吾不關焉인 위정자들 中에서
김병연이 홍경래의 난에서 부끄러운 행동을 보인 김익순을 비난하였으나 그는 바로 자신의 조부였다. 부조리한 세상에서 자신이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자신의 가까운 피붙이였다는 사실, 그리고 그 일로 인하여 사대부인 자신들이 외진 곳에서 숨어 살아야 했다는 사실이 김병연의 온몸으로 전해졌을 것이다. 스무 살의 김병연이 느낀 세상은 모순 덩어리였는지 모른다. 이후 김병연은 삿갓에 몸을 의지한 채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양반들의 잘못된 생활상과 빈곤했던 하층민들의 애환을 글로 옮기며 풍자와 해학으로 퇴폐되어가는 세상을 개탄, 저주, 조소하는 기발한 시구를 가는 곳마다 쏟아놓았다. --- 방랑의 길로 들어선 김삿갓 中에서
또다시 나선 방랑길에서 충청도 계룡산으로 향했고 이곳에서 아들 김익균을 만났다. 그러나 아들이 아버지 김삿갓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간곡히 청하자 그는 아들이 잠든 틈을 이용하여 몰래 떠나 버렸다. 그러다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다시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이로부터 3년 뒤에도 경상도 진주 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으나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피하고 끝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떠도는 김병연의 마음과 삶도 오죽 했겠는가마는 그가 돌아오길 기다리던 아내와 자식들의 삶은 어찌했을지를 생각하면 슬픈 우리 역사의 단면이라는 말로 끝내버릴 수 없는 너무도 큰 비극이라 하겠다. --- 다시 시작된 떠도는 삶 中에서
김삿갓이 평생 쉽지 않은 방랑의 길을 버리지 않은 것은 생에 대한 체념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양심을 외면하지 않기 위한 전 생애를 건 싸움이었는지 모른다. 세도가 안동 김씨의 자손인 김삿갓이 당대에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자신의 재능을 거대한 현실의 모순을 위해 사용하지 않는 것, 작품으로서 자신의 양심과 백성들의 삶을 말하는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