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보증이라는 건 없지만, 한 가지는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책을 읽고, 소개하는 대로 일부라도 진심으로 훈련한다면, 적어도 남은 삶에서 오랫동안 도움이 될 힘을 손에 쥐게 될 것입니다. 그 힘은 마음의 고통을 덜어주는 의지처가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p.8
라마 조파가 건넨 말씀 한마디가 심리치유가로서 제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 “알고 있겠지만, 그저 사람들의 기분이 나아지게 돕는 거라면, 거기에 유익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순간, 제가 딛고 섰던 바닥이 뻥 뚫려버리고 까마득한 현기증이 일었습니다. 몇 년간 심리 상담으로 치료해주었던 의뢰인이 한 명도 빠짐없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쳤습니다. 위기에 빠진 10대들, 비탄에 잠긴 부모들, 눈물 흘리는 남녀들, 혼란과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 수많은 사람이 낱낱이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의 기분이 나아지게 돕는 데 유익할 게 없다고? 그럼 난 심리 치유가로서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건가?’ ---p. 13
현대 심리학과 불교의 방식은 결정적인 부분에서 미묘한 차이를 드러냅니다. 심리 상담사들은 문제가 행복을 가로막는 장애라고 생각합니다. 심리 상담사는 문제를 치워 삶이 즐거웠던 때로 돌아가도록 도우려 하죠. 그런데 불교에서는 대개 문제를 껴안으라고, 오랜 친구처럼 포옹하라고 말합니다. ··· 달라이 라마 같은 큰 스승은 한발 더 나아가 문제를 즐기라고까지 이야기하죠. 문제라는 건 마치 가장 친한 친구처럼 숨김없이 우리 자신을 비춰주기 때문이랍니다. 문제의 본질만큼 내면의 건강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어주는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p. 9
내적 책임에 대한 생각에서 현대 심리학과 불교적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짚어봅시다. 내적 책임이라 하면 흔히 ‘자기 책임’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는 ‘남 탓’을 ‘내 탓’으로 바꾸자는 말이 아닙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핵심은 잘못 자리 잡은, 혹은 무지에서 온 모든 비난을 멈추고, 진짜 비난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황에 대한, 또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잘못된 인식, 그리고 잘못된 인식에서 오는 습관적이고 강박적인 반응이 바로 진짜 비난할 대상입니다. 어떤 선입견도 낡은 추정도 없이, 그저 자신의 마음과 정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명료하고 정직하게 바라보아야 합니다. ---p. 36
우리는 누군가 나를 때려서 화가 났다면, 내 감정에 아무 잘못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그런 짓을 했는데, 어떻게 화난 내가 ‘잘못’일 수 있지? 화를 그냥 흘려보내면 나를 때린 사람은 어떻게 되나? 그러면 정의는 어떻게 되고? 남이 내게 해코지를 해도 그냥 받아들이라고?” 이런 식으로 우리는 스스로 재판을 벌입니다. ··· 복잡한 문제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비난과 책임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게 해법입니다. ---p. 111
사람들은 종종 세상이 진짜 문제, 심각한 문제, 끊임없는 문제들로 가득 차 모두의 안녕을 위협한다고 말합니다. 저는 이 말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힘없는 노동자들은 착취당하고, 환경 자원은 남용되며, 갈등이 폭력으로 해결되고, 사회적 약자들은 방치됩니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서서 지구 곳곳의 형제자매들과 손잡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데 동참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불행과 건강하지 못한 정서가 그런 문제의 탓이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이런 문제들을 풀어낼 수는 없습니다. ---p. 118
우리는 끊임없이 ‘나’라는 말로 자신을 가리키지만, 그 ‘나’가 어떤 식으로 존재하는지는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나의 의식이 어디에 있는지 가리킬 수 있나요? ‘나’는 코, 얼굴, 다리, 뇌 등으로 이뤄진 내 신체인가요? 하지만 팔이나 다리를 잃어도 ‘나’는 여전히 남아 있지 않나요? ‘나’는 내 마음일까요? 나의 정서, 생각, 기억, 관념 같은 것? “나는 내 영혼이죠.”라고 대답할 수도 있겠지만, 이 역시 영혼이 무엇이며, 어디에 있느냐는 질문으로 되돌아오고 맙니다. ---p. 177
다양한 역할 밑바닥에 있는 ‘진짜’ 사람을 찾으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어머니’ 혹은 ‘변호사’ 같은 역할이 한 부분이며 상대적 측면이라는 건 쉽게 인지하지만, 결국에는 표면 아래 숨은 진짜 자아가 있다고 생각하며 “이게 진짜 나야.”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진짜 자아’에 이름을 붙이려는 순간 실패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순간 또 하나의 상대적 배역이 생기는 것뿐이죠. ---p. 179
자아는 연속적입니다. 신념은 학습하고 받아들이는 것이지, 정체성의 고유한 부분이 아닙니다. 신념과 견해가 변할 수 있듯이, 그것들을 바탕으로 하는 정체성도 당연히 변할 수 있습니다. 유익한 신념은 받아들이고, 해로운 신념은 물리쳐 버릴 수 있다는 뜻이니, 우리가 변화무쌍하다는 게 얼마나 좋은 일인가요. ··· 일상을 잘 살아내려면 ‘나’를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하고 적응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p. 181
아침에 먹었을 우유가 낮이 되도록 식탁에 놓인 걸 보면, 여러분은 어떻게 반응하나요? ··· 옳고 그름을 가르는 것, 똑똑한 것, 남에게 좋게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 이런 짓을 한 사람은 멍청하고 실수투성이라고 판단할 겁니다. 여러분은 이런 식으로 누군가에게 손가락질하지 않을 수 있나요? 사실, 이 일을 실수로 보는 자체가 실수일 수 있습니다. 무언가에 실수라는 이름표를 달아버리면, 이제 실수한 사람을 찾아야 할 무대가 마련된 셈입니다. 이게 실수의 원칙입니다. 실수란 늘 누군가의 잘못인 거니까요. 그러나 꼭 이래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 덕에 배움을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이 ‘실수’겠습니까? ---p. 222
샨티데바의 초창기 불교 경구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만약 네가 네 문제를 풀 수 있으면 걱정할 필요가 무엇인가? 만약 풀지 못하면 걱정해 무엇하는가?”
다른 말로 하면,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걱정이나 근심, 두려움이나 낭패감 같은 감정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해를 돕지도 않거니와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데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감정을 불러들이지 말고 흘려보내야 합니다. 이것이 바꿀 수 있는 것은 바꾸고, 그럴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p. 224
불편한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좋은 평판에 집착하면 칭찬과 인정이 필요하고 어떤 비판도 견딜 수 없게 됩니다. ‘파티 주인공’으로서의 ‘나’에 집착하면 다른 사람이 내게 향하는 주목을 앗아갈까 봐 위협을 느끼기도 합니다. 모든 게 마음에서‘만’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태풍이 몰아쳐 집을 잃었다면, 누가 봐도 분명한 외적 상황 때문에 두려움, 상실감, 집착, 슬픔 같은 불편한 정서가 생기는 건 당연해 보이죠. 누구라도 그럴 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태풍을 ‘비난’하나요? 그래서 얻을 게 뭐가 있나요? 이런 감정과 고통을 어떻게 치유할까 생각하면, 결국 내 안으로 눈을 돌려 이 예기치 않은 트라우마에서 ‘평화를 만들어내는 것’만이 답입니다. 바꿀 수 없는 것은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p. 231
제멋대로이며 건강하지 못한 마음을 다스리고 싶다면, 자신의 마음을 공부하는 ‘평생 학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내 마음이야말로 영원히 흥미로운 공부 대상이지요. 각종 문제, 곤경, 불편한 일들, 혼란스러운 경험이야말로 자신에 대해 알 수 있는 최선의, 가장 빠른, 아니 어쩌면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니 고정된 ‘나’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배우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로써 문제를 행복으로 바꿀 수 있기를 바랍니다.
---p. 2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