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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가족
1부 사라진 아이 2부 죽음의 문 3부 A 에필로그 XP바Q 작가의 말 |
저주원규
조민은 꿈을 훔쳐봤다.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과거였다. 꿈에서조차 잊어야 할, 깡그리 태워 없애고 싶은 장면을 조민이 지켜봤다. 그리고 수첩에 적었다. 정인은 총칼 앞에서도 느끼지 못한 두려움을 느꼈다. 누군가 자신의 과거를 알고 있다. 그것은 생존이 걸린 문제였다. --- p.43
정인은 자신을 낳아준 이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궁금증을 느끼기에는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 조민도 그랬을 것이다. 이 세상에 이름조차 등록되지 않은 조민 역시 패배자 아버지의 그늘에서 죽음의 위협에 내내 시달렸을 것이다. --- p.81 물끄러미 벽을 바라보고 있던 정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재가 바람에 휘날리며 벽면에 글씨 같은 것이 보인 것이다. 손으로 검은 재를 닦아냈다. 영문과 한글이 섞인, 비스듬히 새겨 넣은 그 누군가의 글씨. 정인은 그 표식이 누군가 벽에 적어놓은 최후의 흔적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불길에 휩싸이기 전 급한 속도로 써 내려간 단 하나의 표식이 정인의 눈앞에 속살을 드러냈다. XP바Q --- p.82 우리한텐 좋다 나쁘다는 없어. 그걸 잊었나? 그럼 대체 우리에게 남는 건 뭡니까. 이철이 따지듯 물었다. 하지만 정인은 이철의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 p.89 범인 만나면 어쩔 셈이야? 죽여야죠. 차분한 정인의 말에 수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오랜 전통이 있어요. 무슨? 자식을 죽인 부모를 어떻게 죽이는지 알아요? 두 팔과 두 다리를 절단한 다음 과다 출혈로 죽기 직전에 목을 잘라내죠. 그렇게 참수한 머리를 사람들로 붐비는 광장 한복판에 내걸어요. 그러니까 그 말은……. 그대로 해줄 생각이에요. 어디 전통이야? 내가 살아온 세계의 전통이에요. --- p.103~104 그걸 알고 싶어서 찾는 거예요. 뭘 말이야? 내가 왜 살인 기계가 되었는지. 그걸 묻고 싶어서. --- p.197 당신도…… 그걸 찾는 거야?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난 찾는 거 없어. 아무 이유도 없어. 이건 그냥, 절대적인 나에 관한 거야. 그 아이는 나에 대해 알고 있어. 내가 어디서 왔으며 내가 누구인지 조민은 알고 있다고! --- p.205 정인은 과거를 찾아야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있었다. 더는 유령으로 살고 싶지 않았고, 살 수도 없었다. 더는 한창민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정말 모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자신보다는 많이 알 것이다. 정인이 한창민을 찾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덮어둔 기억을 이제는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하고 싶지 않다. 판도라의 상자는 열렸다. 봉인이 풀린 정인의 의식은 진실을 요구하고 있었다. --- p.225 그런 건 죽는 게 아니야. 그럼 뭐가 죽는 건데? 있고 없고가 죽는 걸 결정하는 게 아니란 말이야. 응? 죽음을 결정하는 건 우리 안에 피어나는 기억의 꽃이야. 기억의 꽃? 너와 내가 지금 함께 말하고 마음을 나누는 일. 이런 게 기억의 꽃이야. 이 꽃이 피면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우리 마음속에 남게 될 거야.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너 좀 똑똑해 보인다. --- p.356 넌 누구야? 난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사람은 없어. 내가 그래. 난 내가 아니야. 그렇다고 다른 그 무엇도 아니야. 낮고 작은 목소리인데도 동굴은 두 사람의 목소리를 커다란 메아리로 만들었다. 난 누군가의 기억이고 누군가의 희망, 기다림이야. 그뿐이야. 기억…… 기억 전달자. 맞아. 난 전달자야. 내 기억 속에 담겨 있는 것. 사람들의 기억, 사람들의 말, 사람들의 영혼, 감정, 난 그것들을 말할 수 있어. 나는 그것들을 말하는 순간에만 살아 있는 나야. 그리고 그 기억은 이제 나에게만 남아 있어. 전달한 이도 기억하지 못하는 기억. 오직 이 지구상에 나 홀로만 남아 있는 유일한 기억. 그러므로 나는 그 유일한 기억 속에서만 살아 있어. 다른 그 무엇도 아닌 말하는 나. 기억으로만 살아 있는 나 말이야. --- p.441 있지도 않은 문서를 있다고 믿고 거기에 희망을 걸었다고요? 그게 말이 되나요? 있어야 한다고 믿었으니까요. 그게 믿음이라는 건가요? 그들한테는 그게 믿음이었죠. 존재하지 않는 문서를 믿는 것. ……. 이젠 내가 물을게요. 그 비밀문서…… 정인 씨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해요? 무슨 뜻이죠?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거. 그 자체가 모순 아닐까요? 문제는 그 모순을 받아들이는 태도겠죠. 어차피 우린 결국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 p.504 |
신분을 숨긴 채 평범한 택시 운전사로 사는 ‘정인’과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조강윤’의 폭력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사는 아이 ‘조민’은 서울 외곽의 한 임대 아파트에 사는 옆집 이웃이다. 조강윤의 폭력으로부터 조민을 구해내던 날 정인에게 의문의 사건이 일어나고 그날부터 정인은 조민을 멀리한다. 며칠 뒤, 조민의 아파트에 불의의 화재가 일어나고 조민과 조강윤이 죽는다. 경찰은 이 사고를 부자 동반 자살로 종결짓는다. 하지만 조민의 아파트 벽에서 'XP바Q'라는 의문의 글자를 발견한 정인은 사건의 뒤를 캐기 시작하고 조강윤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정인은 조민의 복수를 위해 조강윤의 뒤를 쫓는다. 한편, 비리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던 경찰 재우에게 정체불명의 단체 ‘A’의 누군가가 찾아와 거래를 제안한다. 혐의를 무마해줄 테니 ‘조민’을 찾아달라는 것. 희귀 질환에 걸린 딸의 치료비를 마련하기 위해 재우는 그 제안을 수락한다. 정인, 재우, 조민, 조강윤, 그리고 A 컨소시엄이란 단체를 둘러싸고 사건은 점점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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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알고 싶어서 찾는 거예요. 뭘 말이야? 내가 왜 살인 기계가 되었는지. 그걸 묻고 싶어서.”
참혹한 현실에서 살아 돌아왔고 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기억의 문》에 나오는 인물들과 단체에게는 ‘과거’라고 불리는 ‘역사’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그 과거를 은폐하고 망각하며 돌아보지 않는다. 그중 유독 어린 시절의 기억을 회피하는 사람이 있는데 바로 유령처럼 살았던 주인공 정인이다. “그녀의 유년은 공포와 두려움, 그 자체였다.”, “자신을 낳아준 이가 누구인지, 자신이 어째서 이곳에 있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81쪽) 정인은 옆집 아이 조민을 만나면서 묻어두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린다. 화재 사고로 조민이 죽자 자신의 숨겨왔던 과거와 대면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궁금증을 느끼기에는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었다”(81쪽)고 고백했던 정인이 조민의 죽음을 통해 잃어버린 자신의 과거를 찾기로 결심한다. 정인은 평범한 택시 운전사의 일상에서 다시 피가 낭자하는 잔인한 과거의 삶으로 돌아간다. 과거를 찾기 위해 과거의 삶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전의 정인은 한사코 과거에서 멀어지려고 총알택시를 몰았다면 이제 정인은 과거에 가까워지려고 구형 소나타 택시의 속도계를 끝까지 끌어올린다. 사당-수원만을 오갔던 정인의 거리는 안산, 정선, 거제도, 오대산, 시흥, 지리산, 인천 송도로 확장된다. 정인이 만나게 되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사회적 기준에서 한참이나 벗어난 괴물로 보여진다. 알코올중독자 ‘조강윤’, 정선 카지노 관리자 ‘강폴’, 다단계 회사의 ‘백영광’, 통나무 장수 ‘양순구’, ‘야왕’, ‘붓다’, 면허취소된 의사 ‘카르멘’, 비밀단체 ‘A’의 ‘함문형’과 ‘정 부장’, 종교단체 ‘기적도화회’의 ‘윤철우’ 등은 영화에 나오는 잔인하고 색깔 짙은 인물들에 가깝다. 그러나 《기억의 문》이 보여주려는 건 물질만능주의 사회에서 괴물이 되어야만 했던 인물들이 아니다. 정인을 발목이 부러지고 부메랑에 손목이 베이고 기력이 죄다 휘발되면서까지 ‘무자비한 액션을 난사’하게 만든 것은, 잔인한 학살의 현장에서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이 짧게나마 자신들의 과거를 마주하고 돌아봤으면 하는 작가의 진심 때문이다. “문제는 그 모순을 받아들이는 태도겠죠.” A는 무엇일까? 단체? 개인? 결사단체? 비밀조직? 주인공 ‘정인’과 ‘재우’는 ‘조민’의 뒤를 쫓다가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정체불명의 단체 ‘A’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A’의 정체는 오리무중이다. “‘도대체 A는 무엇일까? 단체? 개인? 결사단체? 그도 아님 비밀조직?’”(393쪽) 재우는 실체를 알 수 없는 ‘A’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시달린다. “설령 그 아이를 찾는다 해도 A가 자신을 놓아줄지 재우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용 가치가 떨어지자 살해해버린 고동식 검사의 운명이 자신의 미래가 될 수도 있었다.”(398쪽) ‘A’의 수문장 격인 함문형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A에 대해 조금 알게 된다. “A라는 말. 편의상 붙여진 이니셜에 불과합니다. 우두머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지시하는 자도, 지시받는 자도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허다해요.”(464~465쪽) ‘A’는 한 단체에 의해 구체화되는데 그 구성원은 “보수, 진보 가릴 것 없”이 “대한민국 원로회, 퇴역 장성, 전경련 간부 같은 꼰대 노릇 한다는 인물들”(396쪽)이다. 우리는 이것이 한국 사회에서 돈과 권력을 쥔 계급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알 수 있다. 소설은 ‘A’의 모든 기록을 왜곡의 역사로 보며 더 나아가 이렇게 말한다. “원래 A들은 진실을 감추려는 속성을 가져요. 말한다 해도 절반의 진실만 밝힌다고 해야 하나.”(499쪽) ‘A’에 대해 끈질기게 기록하려는 이 소설이 ‘A’의 반대편에만 머무르는 것은 아니다. 소설에 나오는 생생한 대사와 인물, 쫓고 쫓기는 추격전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이야기는 마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정인과 조민의 정체가 드러나고 A의 음모가 공개되고, 재우를 곤경에 빠뜨렸던 배후가 밝혀지면서 소설은 더욱 흥미진진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다.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잠시도 쉴 틈을 주지 않는다. 《기억의 문》은 ‘A’를 탓하는 소설도 ‘B’를 위한 소설도 아니다. 그저 사건의 실체에 더 가까이 다가가려 노력하는 작가의 진지한 고찰이 담긴 진실의 전달자 같은 소설이다. “살아남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켜내는 게 중요해.” 파국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곳이 어디인지도 알지 못했다. 원점으로 되돌아온 기분이었다.”(487쪽) 소설의 막바지에 나오는 정인의 독백은 의미심장하다. 우리가 사는 인생 또한 작중 인물들이 숱하게 피워 뱉는 담배 연기처럼 허공으로 흩어지는 거라고 말하는 듯하다. ‘유토포스’도 ‘토포스’도 아닌 장소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정인이 서게 된 곳은 원점이 아니다. 정인이 아파트 복도에서 조민을 만났던 때부터 직속상관인 한창민이 했던 “살아남는 게 중요한 게 아니다. 지켜내는 게 중요해”라는 말을 떠올렸던 그 순간부터 정인이 서 있는 곳은 결코 원점이 될 수 없었다. 작가는 아픈 과거를 혹은 누군가를 아프게 했던 과거를 그저 잊으려고만 하며 도돌이표처럼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우리에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인이 그랬던 것처럼 조민을 찾아 나서라고, 결코 지나치지 말고 마주하라고 말이다. “난 누군가의 기억이고 누군가의 희망, 기다림”(441쪽)이라고 말하는 각자의 ‘마음속 아이’를 만나라고 말이다. 《기억의 문》은 마지막 장을 덮는 우리에게 유토포스든 토포스든 그곳이 어디든, 지키고 싶은 과거가 있고 참혹한 진실을 마주할 용기가 있다면, 그것이 희망이건 아니건 따위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성장강박증에 걸리고 부조리로 흥건한 이 파국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고 한 발짝 더 나아가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