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한국 교회가 낳은 탁월한 교육자이며 기독교 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 이다. 교단의 중심적인 목회자는 아니지만 그는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왜 기독교여야 하는지, 기독교가 주는 능력의 본질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그것을 제대로 누리면서 한 세상을 두려움 없이 아름답게 살다 갈 수 있는지에 대해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뇌하고 증거 하다 간 사람이다.
1901년 4월 18일 함경남도 함흥의 유가儒家 가문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함흥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일어난 3.1운동에 가담했다. 그 후 일본에 건너가 1922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영어과에 입학했고, 이듬해 지리박물과로 전과했다. 1920년 6월 도쿄에 있는 성결교회에서 세례를 받았으나 교회의 내분에 실망하여 그해 11월 교회를 떠나 정신적인 방황의 날을 보내던 중, 이듬해 1월부터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연구회에 출석하여 약 7년간 그에게 성서를 배웠다.
‘세상에 둘도 없는 선생’이었던 우치무라의 신앙의 자세에서 진정한 기독교적 삶의 태도를 발견하며 가르침을 받은 김교신은 1925년부터 우치무라의 조선인 제자들과 ‘조선성서연구회’를 만들어 성서 연구에 전념하면서 기독교 진리의 근간을 습득해 갔다.
1927년 도쿄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함흥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를 비롯하여 서울 양정고등보통학교, 경기중학교 등에서 약 15년간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각성에 힘을 쏟았다. 한편 1927년 7월부터 함석헌, 송두용 등의 ‘조선성서연구회’ 회원 다섯 명과 함께 잡지 「성서조선」을 발행하기 시작했고, 1930년 5월부터는 주필을 역임했다.
순수한 기독정신을 이 민족의 밑바탕으로 하는 것만이 조국을 구해내는 유일한 길이라고 믿고 「성서조선」을 발행했다.
총독부 검열로 삭제, 발행 금지 처분을 받으면서도 1942년 폐간될 때까지 총 152호를 발간했다. 「성서조선」 1942년 3월호에 실린 글 ‘조와弔蛙’가 문제시되어 그와 그의 동지들은 독립 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김교신은 성서조선의 "조와" 사건이 일어난 1942년 이전에도 이미 조선 총독부의 감시하에서 돼지(군국주의 국가들), 북쪽 아이(나치독일의 침략을 당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벨기에)와 서쪽 어른(폴란드)을 찢는 미친 셰퍼드(나치독일), 미치기 시작한 불독(무솔리니 독재정권치하의 이탈리아) 등으로 빗댄 우화를 통해 비판했다.
1944년 출옥 직후 일본질소비료 흥남공장의 조선인 노동자 주택관리계 계장으로 입사하여 조선인 노동자의 생활 개선과 인격적인 각성에 힘을 기울였지만, 발진티푸스에 걸린 노동자들을 간병하다가 감염되어 1945년 4월 25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