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때 소설가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경손(慶孫), 필명은 빈(彬)이며, 도향은 호이다. 서울의 유명한 의원 집안의 의사 나성연(羅聖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이름인 경손(慶孫)을 쓰지 않고 도향(塗香)과 빈(彬)을 즐겨 썼는데, 그것은 억압적인 가부장질서에 반감을 지니고 자기가 원하는 자신의 이름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경손’이란 이름은 말 그대로 ‘경사스러운 손자’라는 뜻을 지닌다. 도향의 할아버지가 직접 지은 이름으로, 그렇게 되면 부모님조차 함부로 부르기 어려운 이름이 되어버린다. 나도향은 그런 이름의 무게에 답답해했다. 그래서 자신은 전근대적인 억압과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문인 동료들이 추천한 도향이라는 이름을 택했다. 이 이름에는 벼꽃의 향기를 의미가 담겨있다. 이름에 관한 도향만의 일화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봉건적 질서를 가족 내에서 찾고 그러한 책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가족이라는 유교적 집단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서고 싶어 했다. 그런 맥락에서 그는 경성제대 의대를 중간에 그만둔다. 그리고 문학 수업을 받으려고 일본으로 건너간다. 이 일로 가족과 충돌하게 되고 생활비마저 끊긴 상황에서 결국 한국으로 되돌아온다. 192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보통학교 교사로 근무하면서 소설 습작에 힘을 쏟는다. 1922년에는 현진건, 홍사용, 이상화, 박종화, 박영희 등과 함께 《백조(白潮)》 동인으로 참여하여 창간호에 〈젊은이의 시절〉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을 시작하였다. 같은 해에 〈별을 안거든 우지나 말걸〉에 이어 11월부터 장편 〈환희〉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는 한편, 〈옛날의 꿈은 창백하더이다〉를 발표하였다. 특히 〈환희〉로는 대중의 사랑을 받아 작가로서 나도향이라는 이름을 세간에 알리게 된다. 1923년에는 〈은화백동화〉, 〈17원50전〉, 〈행랑자식〉을 발표했고, 1924년에는 〈자기를 찾기 전〉, 1925년에는 〈벙어리 삼룡〉, 〈물레방아〉, 〈뽕〉 등을 세상에 내놓았다. 한국나이로 스물다섯 살 때 요절하는 바람에 작품이 많지 않다. 폐병으로 인한 병사였다. 도향의 작품은 많지 않지만 짧은 시기 동안 비교적 대비를 이루는 활동을 했다. 초기에는 작가 지망생으로서 주관적 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제대로 걸러내지 못해 발표작들의 완성도가 낮다. 일종의 습작기 작품으로 객관화된 '나'로 형상화되지 못한 인물들이 주류를 이룬다. 그러다가 〈행랑자식〉이나 〈자기를 찾기 전〉과 같은 작품부터 빈곤한 현실을 정면으로 다루며 냉혹한 사회를 보여주려고 한다. 주인공들은 사회의 치부와 대결하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도향의 작품이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로 넘어가는 변화를 보여준 것이다. 그 성과물로 〈벙어리 삼룡〉, 〈물레방아〉, 〈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