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방 한 칸
내 키만한 슬레이트 지붕 아래
한 달에 3만원 내는 방 한 칸을 얻다
외로움도 오래 껴안고 자다보면
애첩이 되리
봉급 받는 날
염소는
고삐에 묶여서
한평생 또 한평생
고삐의 길이만큼
멀리 나갔다가
밤에 집으로
돌아간다네
--- p.95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방에 누에고치처럼 동그랗게 같혀서 희고 통통한 나의 세상 바같에 또 다른 세상이 있을 거이라 생각하고 그 세상에도 눈이 이렇게 많이 오실 것인데 여우 한 마리가, 말로만 듣던 그 눈도 털도 빨간 여우 한 마리가 나를 홀리려고 눈발 속을 헤치고 네 발로 어슬렁어슬렁 산골짜기를 타고 내려올 것이라 생각하고 여우 한 마리가, 그 작은 눈을 글썽이며 그 눈 속에서도 서로운 눈이 소문도 없이 내리리라 생각하고 나는문득 몇해 전이던가 얼음장 밑으로 빨려들어가 사라진 동무 하나가 여우가 되어 나 보고 싶어 왔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자리를 차고 일어나 방문읗 확 열어제껴보았던 것인데 눈 내려 쌓이는 소리 같은 발자국 소리를 내며 아아, 여우는 사라지고- 여우가 사라진 뒤에도 눈은 내리고 또 내리는데 그 여우 한마리를 생각하며 이렇게 눈 많이 오시는 날 밤에는 내 겨드랑이에도 눈발이 내려앉는지 근질근질거리기도하고 가슴도 한엇이 짠해져서 도대체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던 것이다.
--- p.
섬
섬, 하면
가고 싶지만
섬에 가면
섬을 볼 수가 없다
지워지지 않으려고
바다를 꽉 붙잡고는
섬이, 끊임없이 밀려드는 파도를 수평선 밖으로
밀어내느라 안간힘 쓰는 것을
보지 못한다
세상한테 이기지 못하고
너는 섬으로 가고 싶겠지
한 며칠, 하면서
짐을 꾸려 떠나고 싶겠지
혼자서 훌쩍, 하면서
섬에 한번 가봐라, 그 곳에
파도 소리가 섬을 지우려고 밤새 파랗게 달려드는
민박집 형광등 불빛 아래
혼자 한번
섬이 되어 앉아 있어봐라
삶이란 게 뭔가
삶이란 게 뭔가
너는 밤새도록 뜬눈 밝혀야 하리
--- pp. 56-57
사랑
여름이 뜨거워서 매미가
우는 것이 아니라 매미가 울어서
여름이 뜨거운 것이다
매미는 아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한사코 너의 옆에 붙어서
뜨겁게 우는 것임을
울지 않으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매미는 우는 것이다
--- p.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