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의 기원을 발견했네. 축하해.”
이령이 팔짱을 끼며 빈정거렸다. 스스로도 예측하지 못했던 공격성이었던지 그녀가 흠칫 놀라며 린을 올려다보았다. 린은 그제야 크레바스의 간극이 조금씩 벌어지고 있음을 눈치챘다. 단 며칠 사이에 서로의 입장이 양극을 향해 치달을 수도 있게 된 정황이 비로소 무시무시한 막막함으로 다가왔다. --- p.50
미안해, 엄마. 미안해, 엄마. 한 번도 사랑해 엄마, 라고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럴 줄 알았으면 미리미리 해둘걸. 엄마랑 눈이 마주칠 때마다 사랑해, 그럴걸. 미안해.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해, 엄마. --- p.54~55
이래 봬도 우린 첫사랑이야. 평생 셀 수도 없이 많은 거짓말을 달고 산 네 아빠지만, 그래도 첫사랑이 나라는 말만큼은 진실이야. 그렇게 믿고 싶은 게 아니고, 믿어져. 평생 둘러댄 거짓말로 만리장성을 쌓을 수 있을지라도 평생 내 곁에 머문 것도 사실이니까. 네 아빠는 첫 약속을 지켰어. 첫 입맞춤 뒤에 했던 말을. --- p.56
은탁은 그녀와 엇갈릴 때마다 온몸의 관절이 시큰시큰했다. 잘 쌓아 올린 담장의 밑돌이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언제 머리 위로 돌무더기가 쏟아져 내릴지 알 수 없는 길에서의 달리기는 더 이상 달리기가 아니다. 도주다.
수연의 농 섞인 경고가 아니더라도…… 방심하지 말자, 린은 곧 돌아갈 것이다. --- p.70
그는 자신을 서은탁 그 자체로 봐준 적 없는 소정이 얄미웠다. 그녀에게 자신은 그녀와 그녀 어머니 두 식구에게 대가 없이 거처를 내어준 교우회장의 외동아들이었고, 근본 없다며 남들이 얕볼세라 대충 둘러댄 촌수로 엮인 일가붙이 동생이었고, 초등학교 후배이자 본당 배형제였고, 그녀를 둘러싼 어린 구애자들 중 하나일 뿐이었다. --- p.101~102
생은 반복된다. 첫날인 듯 처음인 듯 단 한 번뿐인 듯 우리를 현혹하지만, 어쩌랴, 생은 돌고 돌고 돈다. 시계 방향이든 그 반대 방향이든 멈춰 서지 않는다. 어느 날 모래를 채운 샌드백처럼 삶이 무거워져 제자리에 오뚝 멈춰 설 수 있다면, 그건 차라리 기적이다. 그사이 우리는 어느 때 어디선가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그리고 잊힌다. --- p.123
나 알아요? 당신은 날 아나요?
린은 떨리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림 속, 사진 속 여인의 스무여 해가 파노라마처럼 지나갔다. 자신이 결코 알지 못했던 아빠의 가벼움과 무거움, 그만큼 필사적인 붓질로 모욕의 밤들을 건넜을 엄마의 심연의 어두움과 소음들이 여인의 짧은 생에 중첩됐다.
린은 두 무릎 사이에 고개를 처박았다. 모두를 위한 애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 p.147
그는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주방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 수돗물 소리, 도마질 소리…… 들이 어우러져 그럴싸한 화음을 이룬다. 고통과 희열로 직조한 대위법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이만하면 완벽하다. --- p.183
“(…) 내가, 아저씨가 제일 아끼는 뭔가를 망가뜨려도 아저씬 무조건 내 편이 돼줘야 해요. 난, 아저씨가 제일 아끼는 그 어떤 물건보다, 그 어떤 누구보다, 제일 아끼는 사람이 될 거거든. 알아들어요?” --- p.232~233
사람들은 잊기 위해, 아니면 잊히지 않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한다. 잘 잊고, 잊혀도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나는, 그래서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사는 게 무섭다가도 그 사실을 잊고, 인생 대수로울 게 뭐냐 매일 하루 치만 열심히 살자 하다가도 그 결심을 잊는다. 실수쯤이야. 그조차 곧 잊을 텐데 뭐. 잊거나 잊히는 일에 절박한 사람들은 어떨까. 이를테면, 잘려나간 기억의 환지통(幻肢痛)을 앓는 사람들. 이 소설은 망각과 복원, 기억의 소멸과 기억의 재구성에 관한 그들의 이야기이다.
---「작가의 말」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