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십대를 돌이켜보면 불안보다 안정을 못 견뎌하던 때였다. 반듯한 범생이보다 반항적이고 불친절한 남자에게 더 매력을 느꼈다(물론 그 대가는 상처였다). 안정된 직장을 다니다가 불쑥 사표를 냈다. 자아를 찾겠다고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물론 백수 신분이라 카드 값 갚느라 숨넘어가는 줄 알았다). 가난한 살림에 유학을 가겠다고 집안을 발칵 뒤집어놓기도 했다(물론 엄마한테 삼복 날 똥개 얻어맞듯 얻어맞았다). 그렇게 거칠고 불편하고 고독해야만 그럴듯한 인생을 사는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이십대란 무척 골치 아픈 나이다. 세세한 일이 하나하나 맘에 걸리고,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우쭐해지거나 콤플렉스를 느낀다. 삶은 뭔가 드라마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사랑은 물불 안 가리는 열정이 있어야 하는 줄 알고, 잘 사귀다가도 어느새 “야, 우리 사랑은 가짜야!”라고 외치며 뒤돌아선다. 그러니까 이름하여, ‘안전 거부증’. --- pp.51-52
연구소에서 내가 스타일걸이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완벽한 변신은 몇 번의 이별 경험이 가져다준 학습 효과였다. 남자들은 어려 보이니 순진해 보이니 하며 청순한 여자를 찾는다. 하지만 정작은 앙큼하고 감흥을 낼 만한 암고양이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나서 한참이나 뒤의 일이었다. --- p.56
건형을 좋아할 때 왜 좋아하는지 어떤 점이 좋은지 나는 설명할 수가 없다. 그것은 헤어져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아주 사소한 표정, 하찮은 손짓 같은 것. 뒷머리를 미안한 듯 웃으며 긁적이는 표정, 코에 난 작은 점, 웃을 때 깔깔대던 목젖, 따뜻하게 감싸 안던 팔.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무슨 통사법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 pp.83-84
직장 상사에게 아부하는 것은 미래 장기 보험을 드는 일이다. 하지만 직장 상사에게 성적 모욕을 당하는 것은 어떤 선택 앞에 서게 되는 일이다. 적립식 펀드를 계속 들 것인지 깰 것인지 하는. --- p.156
남자들은 키스를 여자의 옷을 벗기기 위해 대충 치르는 전초전 정도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키스를 잘하려면 대단한 시간과 공이 필요하다. 우선 섬세한 입의 모든 구조와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듯 템포와 리듬을 알아야 한다. 언제 강하게 누르고 언제 가볍게 장난치듯 스쳐야 하는지, 언제 입을 벌리고 언제 떨어져야 하는지. 키스를 잘하려면 침과 호흡을 조절해야 하고 관능적으로 머리의 위치를 바꿀 줄도 알아야 하고 얼굴 전체에 키스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입술 근처와 손가락, 귀, 목덜미, 관자놀이, 눈썹……
--- p.1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