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지금 뭐라고 써 있냐”
로또라도 맞은 것 같은 할머니 목소리에 놀라서 텔레비전을 쳐다봤다.
〈서울 관악구 편〉
예심: 2012. 6. 14(목) / 장소: 구민회관 대강당
녹화: 2012. 6. 16(토) / 장소: 구청 주차장
관악구라면 우리가 사는 동네다.
할머니가 뜬금없이 말했다.
“나, 저기 나갈란다.”
‘나가고 싶다’ ‘나가면 안 될까’ ‘나가면 어떨까’ ‘나가도 될까’도 아니고 ‘나갈란다’라니.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전국노래자랑〉을 보면서도 저 무대가 우리 같은 사람이 설 수 있는 무대라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절대로 없다. 옆집 할머니, 뒷집 아저씨, 앞집 누나, 앞집 누나의 옆집 아줌마가 다 나와도 우리 식구는 나갈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 . ---pp. 10~11
나는 저녁이 싫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에는 늘 나 혼자였다. 낮잠을 자다가 일어났을 때, 방 안에 가득 차오르기 시작하는 석양빛을 보면 이유 없이 서글펐다. 할머니는 반찬 가게 문을 닫는 여덟 시 이전에는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할머니를 기다리지도 않았다. 나는 찬밥처럼 빈 방에 담겨진 채 컴퓨터 게임을 했다. 불 켜는 것도 잊은 날에는 컴퓨터 화면에서 새어 나오는 푸르스름한 빛이 온 방을 가득 채웠다.
그렇게 오래 있다 보면 세상에는 나 혼자뿐인 것처럼 느껴졌다. 밝은 빛도 없고, 아빠도 없고, 엄마도 없고, 할머니도 없는, 완전 고립무원의 세계 속에서 나는 아무런 기대도 갖지 않은 채 혼자였다. ---pp. 31~32
볼일을 다 보고, 공호가 있는 방을 찾던 나는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멈칫했다. 룸에 있을 때에는 잘 들리지 않았으나 밖에서 들으니 분명하게 들렸다. 감성을 울리는 여자의 노랫소리가.
나도 모르게 노랫소리를 따라갔다. 그리고 문 옆에 서서 귀를 기울였다. 뭐라고 표현을 할 수 없을 만큼 묘한 매력을 풍기는 목소리.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호두처럼 단단했다. 중저음에 강하면 고음에 약한데 고음 부분도 중저음처럼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전국노래자랑〉만 십삼 년을 시청한 내 귀로 듣기에 한두 번 불러 본 솜씨가 아니다.
하지만 더 놀라운 건 노래에서 소울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내가 할머니한테 주장했던 바로 그 소울. 노래를 아무리 잘해도 노래에 영혼이 담겨 있지 않으면 감동을 줄 수가 없는데, 저 노래에는 영혼이 담겨 있다. 뭐랄까. 깊고 깊은 심연에서 끌어올린 듯한, 창자를 토막토막 끊어 놓을 듯한 애절함 같은 것이.
노래가 끝나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노래방이 물속에 잠긴 듯 조용했다. 나는 숨죽이고 기다렸다. 잠시 후, 전주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도 모르는 노래다. 목소리 자체가 굉장히 독특했다. 한 번 들으면 질리는 목소리가 있는데 이 목소리는 들으면 들을수록 더 듣고 싶어진다. 노래 부르는 사람이 궁금했다. 나이는 몇 살이나 됐을까? 어떻게 생겼을까? 플라스틱 창 너머를 슬며시 들여다보았다.
룸 안에는 여자 혼자 화면을 바라보며 노래를 하고 있었다. 화려한 불빛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분명 교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투명 인간이 되어 룸 안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노래가 끝나고 점수가 나오면서 룸 안은 순식간에 밝아졌다. 그리고 그 짧은 순간 나는 그 여학생이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린다. 그런데 누굴까? 혼자 노래방에 온 이 용감한 여학생은? 뒷모습이 익숙하다.
점수를 확인한 여학생은 무언가를 찾으며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 아이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동시에 나 역시 재빨리 몸을 숨겼다. 벽에 몸을 딱 붙이고 서서 뛰는 심장을 손으로 가만히 눌렀다. 그 아이가 고개를 돌리는 것과 내가 몸을 돌리는 것이 어쩌면 똑같은 순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 아이는 나를 보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분명히 봤다.
조미미를! ---pp. 50~52
“내가 왜 미친놈처럼 실실 웃고 다니는지 아냐”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운동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공호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말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웃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 그런 세상에 공호는 살고 있었다. 밤마다 운동장을 숨이 끊어질 정도로 뛰면서도,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다닐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 그게 공호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pp. 113~114
할머니는 공호 앞에 호박전과 계란말이, 나물 들을 덜어서 놔 줬다. 공호는 석 달 열흘 굶은 곰처럼 밥을 폭풍 흡입하기 시작했다.
“든든히 먹어 둬. 밥심이 있어야 버티지.”
할머니에게는 밥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만병통치약이었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동네 친구들에게 맞고 들어오면 할머니는 밥상을 차렸다. 한 그릇 가득 밥을 푸고 자반고등어도 굽고 김도 구워 밥상을 차려 왔다. 밥 때도 아닌데 밥을 먹으라고 했다. 배가 고프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밥을 보면 밥이 먹고 싶어졌다. 땟국물이 얼룩진 얼굴로 앉아 나는 꾸역꾸역 밥을 먹었다. 할머니가 차려 준 따끈따끈한 밥을 먹고 있으면 억울하거나 슬픈 기분이 점점 풀어졌다. 따뜻한 기운은 목구멍을 넘어 위로 들어가고 창자에 차곡차곡 쌓이면서 위로가 쌓이고 사랑도 쌓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할머니의 밥은 작은창자에서 영양분이 되어 온몸으로 퍼져 나가고 분하고 억울한 기분은 큰창자로 가서 똥이 되어 빠져나왔다.
---pp. 187~188
“내가 왜 미친놈처럼 실실 웃고 다니는지 아냐”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운동장 바닥에 주저앉았다. 공호가 웃음기가 싹 가신 얼굴로 말했다.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웃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 그런 세상에 공호는 살고 있었다. 밤마다 운동장을 숨이 끊어질 정도로 뛰면서도, 낮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웃고 다닐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 그게 공호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