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제 생명을 구해주시기도 했잖아요'
순간 애리언은 깨달았다. 트리스턴은 그녀가 원한다고 믿는, 그런 자유로움을 애리언에게 허용해주려고 하고 있었다. 비용이 얼마가 들게 될지는 그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것이야말로 하찮은 몇 백만달러보다 훨씬 중요한 일임을, 그리고 의심의 그림자를 완전히 걷어내버리는 일임을 그녀도 깨닫게 된 것이었다. 애리언은 자신의 목에 걸고 있는 부적을 머리위로 벗겨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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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스턴 레넉스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처럼 서서히 고문을 가하는 듯한 기묘한 느낌이 온몸을 휘감을 줄이야. 비난으로 가득 찬 애리언의 시선과 마주친 순간, 자책감이 목을 벌겋게 뒤덮고 턱 선을 타고 올라가서 그의 뺨 위에서 꺼지지 않는 겁화를 피우고 있는 것만 같았다. 트리스턴은 속옷이 발목에 걸려있는 상황에서 마누라에게 들켜버린 바람난 남편이라도 된 것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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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턴이 접혀 있던 은행 수표를 펴서 애리언의 나긋나긋한 손에 쥐어주는 모습을 본 군중들은 하나 같이 숨을 멈추었다.
애리언도 기쁨에 들뜬 나머지 그가 주는 것을 받으면서도 아무런 말조차 할 수가 없었다. 이제야말로 그녀가 원하는 것은 모두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마법. 돈. 그리고 트리스턴 레넉스와 같은 남자들의 온갖 요구와 농간으로부터의 자유.
하지만 카메라의 플래시가 터지고 나서 그녀에게만 군중의 찬사가 집중될 수 있도록 트리스턴이 뒷걸음질을 치자, 애리언은 지금 막 얻은 것보다 더욱 커다란 그 무엇인가를 잃어버리고 만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트리스턴은 샴페인 잔을 입가로 가져가면서 애리언이 군중들 사이를 헤쳐나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카퍼필드는 그녀의 팔꿈치를 잡아주면서, 점차 날카로워지는 기자들의 질문공세에서 버서나도록 이끌어주었다. 탐욕스러운 기자들의 말장난에 그녀 스스로 궁지에 처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그녀의 수호천사를 자임하고 나선 것이었다.
빌어먹을 스벤은 대체 어디로 간 거야? 트리스턴은 지정해준 자리인 부측 문 옆에 보디가드가 보이지 않자, 조금은 초조해지고 있었다. 에디 홉스와 비웃는 소리를 주고받으면서 주변을 훑어보았을 때만 해도 불온한 기미는 전혀 차아볼 수 없었고, 특히 와이트 리즈처럼 시한폭탄 같은 친구도 눈에 띄지 않았었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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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네 발로 기다시피 하면서 힘겹게 일어선 애리언은 한달음에 달려가 트리스턴이 위해를 당하지 않도록 막아주려고 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얼음 바닥에 미끄러지면서 그대로 트리스턴의 품속으로 넘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그 순간, 자신의 등에 총알이 박히는 느낌과 동시에 흐릿하게 들려오는 총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애리언이 자신의 품으로 쓰러지자 트리스턴은 목이 터지는 듯한 절규와 함께, 오래 전에 그가 아서와 그랬던 것처럼 그녀를 안은 채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그가 필사적인 손짓으로 애리언의 출혈을 막아보려고 허둥대는 동안, 애리언의 속눈썹은 파르르 떨렸으며, 곱실거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은 희미하게 윤기를 내는 검은 수의 자락처럼 트리스턴의 무릎을 덮으면서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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