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겨울 새벽 그가 잠을 깨어 보니 밤새 창 밖에 눈이 하얗게 내려 쌓여 있었다. 그는 그 눈을 보자 서울 교외의 산자락 아래 들어박혀 살고 있는 한 벗의 집이 떠올라서 곧바로 그 친구네로 차를 달려갔다. 교외길 주변은 온통 눈 세상을 이루고 있었고, 친구네 또한 그 애애한 아침 눈빛속에 아직 고즈넉한 정적에 싸여 있었다. 그런데 집안의 친구는 그가 불러도 한동안 아무 기척도 없었다. 이 친구가 어디 출타중인가? 그가 몇 차례 더 기척을 보내며 기다리고 있으려니, 뜻밖에 등뒤에서 벗의 소리가 들렸다. '나 여기야.' 위인은 벗이 찾아온 소리를 듣고 뒷문으로 집을 돌아 등뒤로 나타난 것이었다.
'뜰앞의 눈이 하도 고와서 차마 내가 밟고 나오기가 아깝더구만. 자네가 왔으니 자네가 먼저 저 눈을 밟고 내 집엘 들어오게 하려고 일부러 뒷문으로 길을 돌아 나왔지. 자 그러니 자네가 앞장서 이 눈을 밟고 들어가자구.'
--- p.152
'수평선 단상 -넓어지려면 단순해질 일이다'(106쪽)
'낚시터에서 모자가 바람에 날아가 물 가운데로 멀어져 가는 것을 보면서 문득 내가 나를 버릴 수 있음을, 내가 아픔없이 나를 작별할 수도 있음을 알았다' (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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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읽기가 더욱 재미있을 수 밖에 없었다. 하여 나는 그 이후부터 집안에 있는 소설책을 모두 찾아 읽었다. 지금 대강 기억나는 것으로는 예의'순애보'이외에 김말봉의 '밀림''찔레꽃' 박종하의 '다정불심' 따위 대중 연애 소설과, 이광수의 '무정' 김동인의 '배따라기' 빅토르 위고의 ' 레 미제라블' (당시의 책제는 '불쌍한 사람들'이었다)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 같은 본격 번역 소설에 이르기까지 집 안에 있는 책 목록은 모두 섭렵한 셈이었다.
--- p.41-42
그리고 서당에서 배운 책이고 학교시절에 읽은 책이고 지금은 거의 그 내용을 기억할 수조차 없다. 설혹 그것들을 다 이해하여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한들, 그리고 그 시절 '사서삼경'이나 어떤 고급한 선지식을 읽었다 한들, 지금의 나에겐 그 고지식한 글방 선생님이나 국어 선생님의 나이를 넘어선 글읽기와 삶의 모습보다 더 귀한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책은 없었으리라 생각된다. 더불어 그분들의 평생 글읽기는 바로 그분들의 삶이자 즐거움이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깨달음, 책읽기를 통한 끊임없는 자기 창조의 기쁨이 함께 했으리라는 믿음을 가져보기도 한다.
--- p.1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