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나 스스로 학력을 위조했건 결과적으로 위조한 것이 되었건 다 똑같은 것 아니냐고 보겠지만, 내게 그것은 나의 양심, 나의 마지막 도덕심이 걸린 문제이다. 법적으로는 여전히 나를 범죄자라 불러도 이제는 아무 상관이 없다. 1년 6개월의 수감 생활을 겪으면서, 나는 내게 내려진 형벌을 논문 대필에 대한 대가로 생각하고 뼈저린 반성을 하며 고통을 참았다. 아무런 심각성도 없이 그저 편하게 세상을 살려고 한 것이 범죄가 될 수 있고, 내가 그런 범죄자라는 것이 견딜 수 없는 고통이자 아픔이었다.” --- p.50, 「사라져버린 학위에 관해」 중에서
“내가 당신을 원망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선택은 내가 한 것이니 아무런 원망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온 힘을 다해 일했던 큐레이터직, 학교 교수직, 광주비엔날레 감독직도 모두 잃었다. 물론 그것이 아쉬워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정말 답답하고 억울한 것은 내가 온 세상에 거짓말쟁이로 알려진 것이다. 7월 한 달 내내 신문과 TV에 커버스토리로 나와서 이제 어느 곳에도 설 자리가 없고, 더 이상 살아가야 할 의미조차 없다. 학위를 돌려받자는 것이 아니다. 10년, 아니 20년이 걸려도 나와 관련된 모든 진실을 알자는 것이다. 어차피 내가 논문을 쓴 것도 아니고,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모든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려 한다. 설령 사람들이 그것조차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잘못한 것은 잘못한 대로 사죄하고 사실은 꼭 밝혀낼 것이다.” --- pp.268-269, 「학위브로커 린다 트레이시와의 대화 중에서」 중에서
“우리는 가끔 같은 책을 읽고 열정적으로 토론을 하다 싸우기도 했다. 똥아저씨는 나더러 세상을 매혹시키는 사람이 되라고 했다. 아마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똥아저씨가 내게 왔을지도 모른다. 미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선진국에서는 관광 산업에서 엄청난 외화를 벌고 있는데, 관광 산업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그 나라의 문화이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는 문화 분야가 국가 운영의 중추여서 정부에서도 문화부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정권 교체기가 되면 우리나라처럼 누가 국무총리가 되고 누가 기획재정부 장관이 되느냐보다 누가 문화부 장관이 되느냐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똥아저씨는 나보고 전시기획에만 빠져있지 말고 정치, 사회, 경제 등 나라 돌아가는 일 전반에 관심을 가지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저녁 뉴스를 놓칠 때에는 YTN 뉴스라도 시청했고, 각 부처별로 일하는 내용을 알기 위해 KTV를 본 다음 똥아저씨에게 궁금한 것을 묻기도 했다. 똥아저씨
는 전시 말고는 아무런 욕심도 없는 나에게 미운 감시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조금만 나태한 기미만 보여도 신랄하게 비판을 해서 내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
…… 똥아저씨는 진심으로 내가 큰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나를 사회에 내놓기 위해 똥아저씨는 오랜 시간을 친구로, 연인으로, 선배로, 아빠로 있어주었다. 내 사건이 터지고 우리 관계가 만천하에 폭로된 후 나는 똥아저씨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어 실망도 컸지만, 그간 나를 아껴주고 돌봐준 것에 대해서만큼은 진심으로 감사한다. 그리고 똥아저씨가 내내 행복하기를 바란다.” --- pp.134-144, 「변양균 씨와의 일화 중」 중에서
“어느새 해가 바뀌었다. 봄이었다. 창살 너머 보이는 나뭇가지에 살짝 푸른 기운이 감도는 것을 보며 감옥에서 참 많은 시간이 흘렀음을 새삼 깨달았다. 그 겨울에 나는 혹독한 추위에 온몸이 얼어붙었고, 찜질팩과 담요로 몸을 감싸며 죽을힘을 다해 추위를 견뎌야 했다. 20년 전에는 바닥에 불도 넣어주지 않았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때였고 나는 당장 미치도록 추웠다. 구치소는 바깥 온도가 영하 10도가 되어야만 바닥에 난방을 넣어준다. 더구나 영등포구치소는 이사가 예정되어 있을 만큼 오래되고 낡아서 외풍이 워낙 심하다보니 바닥에 난방이 들어와도 얼굴은 항상 발갛게 얼어 있게 마련이었다. 게다가 찬물에 겨울수의를 빨 때면 정말 눈앞이 노래왔다. 무거운 겨울옷을 찬물에 담갔다가 들어 올릴 때는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부어야 했다. 죄짓고 감옥에 온 우리야 어쩔 수 없다지만, 우리를 지키는 교도관들조차 똑같이 열악한 조건에서 더위와 추위를 견뎌야 하니, 보는 내가 민망할 지경이었다.” --- p.375, 「수감 생활의 소감」 중에서
“그 와중에 ‘누나부대’도 생겼다. 구치소에서는 수용자들에게 일주일에 두 번 목욕을 시키고, 30미터가 채 안 되는 운동장이나마 일주일에 네 차례, 한 시간씩 걸을 수 있게 해준다. 남자 사동과는 하얀 담이 사이에 있건만, 남자 수용자들은 내 운동 시간을 기가 막히게 알아내서 운동장이라도 걸을라치면 미리 준비해둔 플래카드를 들고 흔들어댔다. 종이를 수십 장 잇대어 만든 커다란 플래카드에는 ‘정아 누나 사랑해’라는 말과 빨간 하트가 줄줄이 그려져 있었다. 남자 수용자들은 “정아 누나, 힘내요. 변양균이는 우리가 잘 데리고 있을 테니 걱정 말아요”라며 큰소리로 응원을 해줬다. 덕분에 구치소 하얀 담장이 몇 센티미터 더 올라가게 되었고, 나는 그나마 웃을 수 있는 재미조차 빼앗기게 되었다.” --- p.384, 「수감 생활의 에피소드 중」 중에서
“노 대통령이 그렇게 이모저모로 내게 관심을 쏟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접적인 도움을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어쨌건 내가 도움을 원하지 않았다. 내가 미술계 밖의 일에는 도무지 관심을 보이지 않자 심지어 노 대통령은 측근인 모 의원을 소개해주셨다. 아마도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가 통하지 않을까 생각하신 것 같았다. 언론에서는 ‘대통령의 남자’라며 여러 사람을 거론했지만 실제로 대통령이 생각하는 당신의 사람은 내게 소개해준 의원이라는 것이 내 직관적인 느낌이었다. 소개받은 분을 만나고 나서 대통령께 내가 느낀 인물평을 말씀드리자, 대통령은 ‘역시 신정아’라고 하셨다. 그 후로도 나는 멀리서나마 나를 신뢰해주는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늘 마음이 든든했다.” --- p.148, 「배후설에 관해」 중에서
“9월 11일 화요일, 이제는 내 누드사진이라면서 정체불명의 사진이 문화일보 1면에 실렸다. 처음에는 사진을 보고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사진작가들이 심심풀이로 그런 사진들을 만들어서 사람들을 놀려주거나 즐겁게 하는 경우를 가끔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게 내 사진이 아니라는 사실은 금세 밝혀질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신문과 인터넷에서는 그 사진을 두고 내가 미술계와 정계에 ‘몸 로비’를 한 유력한 증거라며 떠들기 시작했다. 똥아저씨의 메일이 공개된 마당에 누드사진까지 나왔으니 성 로비 설은 아예 기정사실화되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생각했던 문화일보 기사가 일으킨 파장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다.”
--- p.318, 「문화일보 누드사진에 관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