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도 세계의 종말은 나의 창문 아래에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디에서든 시작되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단지 그 시작에 대해 말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을 뿐이다. [……] 모든 것은 숨 막히게 무더운 어느 밤에 시작되었다. 그것은 대양의 영향이 미치지 못하는 곳, 난바다에서 불어오는 서늘한 바람의 구원을 기대할 수 없는 지역들에서, 대륙의 기후가 음흉한 마녀인 양 정기적으로 꾸며 내곤 하는 무더운 봄도 끝나 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이미 우리 앞에는 기상학의 문헌 속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지옥과도 같은 여름의 불타는 문들이 열리고 있었다. 그 봄과 뒤를 이어 온 그 여름……. 전문가들은 이 기간이 역사에 남을 기록적인 계절들이 될 것이라 예고했다. --- pp.13~16
이른바 〈관찰 기간〉이 한창일 무렵, 6월 말의 어느 목요일 저녁이었다. 초인종이 울렸고 문 앞 층계참에는 에스테르가 서 있었다. 소녀들이 입는 평범한 드레스를 걸치고 서 있는 그녀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답고, 매혹적이고, 탐스러웠다. 지극히 단순하고도 단정한 형태로 목이 파진 그 소녀복, 팔과 무릎을 드러내고 몸통에 착 붙어 있는 그 소녀복은 겉으로는 천진하고 신선하기만 한 것 같지만, 사실은 관능과 성(性)의 유혹을 강렬하게 발산하고 있었다. 그녀가 층계참에 나타난 그 순간부터, 그녀가 현관방을 통과하는 그 순간부터 이 에스테르는 이미 벌거벗고, 뜨겁고, 향내 풍기는 하나의 몸이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물결치는 그녀의 머릿결 사이로 가끔씩 드러나는 이마와 관자놀이에서는 의지와 연약함, 낙관과 우수, 사랑에 대한 욕망과 이별에 대한 고통스런 두려움 등 상반된 감정이 불안스레 교차하고 있었다. 이 〈밤의 에스테르〉, 이 유일한 밤의 에스테르는 나의 생의 모든 에스테르들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고도 비밀스런 에스테르였다. 그녀는 한 달에 단 한 번, 그 유일한 밤에만 보는 에스테르, 오전에 집안일 하는 처녀 에스테르나 오후에 음악 공부하는 여학생 에스테르가 아닌 또 다른 에스테르, 이 서로 다른 두 에스테르의 외모를 서로 닮아 보이게 해줄 수 있는 --- 뭐라고 정확히 말할 수는 없지만 --- 어떤 공통적 특징들을 빌려줄 수 있는 또 다른 에스테르였다. (만일 인간 표정에도 구문(構文)들이 있고 용모에도 어휘가 존재한다면, 그것들의 수는 무한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속한 특징들 중 몇 가지만 공유한다 하더라도 두 사람은 서로 비슷해질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각자의 차이가 없어지지는 않을 것인바, 각 사람의 정체성을 이루는 특이성은 때로는 미묘한 세부에 있기 때문이다.) --- pp.86~87
그때 나는 보았다. 음악가들이 나의 창문 아래를 --- 세계의 종말이 시작되었던 바로 그곳 --- 지나가고 있을 때, 그들 뒤쪽에 마치 긴 치맛자락 마냥 펼쳐지고 있는 어둠 속에서 어떤 기이한 형체들이 몸을 일으켜 행렬에 합류하고, 그들의 뒤를 몇 발자국 뒤따라 가다가 다시 스러져가는 광경을……. 그것은 어둠 속의 그림자들, 즉 사진 음화(陰畵)와도 같은 그 환한 얼룩이 아직도 보도 위에 남아 있는 한 쌍의 젊은 연인의 그림자, 아직도 벤치 위에 웅크리고 있는 언청이 클라리넷 연주자의 그림자, 그리고 땅 위에 흩어진 하이든의 악보를 줍고 있는 나의 제자 안토닌의 그림자였다. 그것은 또한 일시적이나마 밤에서 깨어나, 그들 자신의 먼지 속에서 형체를 되찾은 게토의 다른 모든 유령들이기도 했다. 그날 나는 동네가 죽어 있고 거리는 황량하며, 건물들은 마치 식은 재로 빚어진 폐허인 양 기적적으로 서 있는 모습을 발견했지만, 그 전날 밤과 그날 낮 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 모든 것이 어떤 대격변을 암시하고 있다는 거였다. 사실 나 또한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은 이 대사건들을 체험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소란과 열기로부터 멀리 떨어져, 내게 전달된 메시지의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로였다. 도착하자마자 에스테르가 보인 격앙 상태, 세계와 우리 자신에 대해 내가 가졌던 혼란한 인식, 우리 둘의 육체가 사랑 가운데 다시 합쳐지기 전 거쳐야 했던 대결과 경련들, 이 모든 것은 나의 작은 거처에까지, 내 침대의 표면에까지 도달한 어떤 메아리, 시간의 종말에 이르러 몸부림치는 공동체 전체를 뒤흔든 그 격렬한 요동의 메아리였던 것이다. 에스테르와 함께 보낸 밤은 〈역사〉의 수렁에서 튀겨져 나온 흙탕물이 우리의 삶 가운데 투사한 꿈이었다. --- pp.214~215
나의 창문 아래, 거리는 다시금 이전처럼 텅 빈다. 또 하나의 새로운 백지이다. 심장의 고동은 점차로 완화된다. 무언가 금속 같은 것이 나의 뱃속 깊은 곳에 떨어져 내린다. 그 뒤를 이어 온 순간, 한 사람의 운명처럼 길다. 또 그 뒤를 이어오는 순간들, 역사처럼 길다. 그리고, 그 순간들 중에서, 이 거리, 보도 위, 움직이지 않는 몸들 위…… 떠오르는 질문……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인류의 적인가? 그렇다면 대체 어떤 적이란 말인가? 청년과 소녀…… 한 사람이 다른 이의 손을 잡아끌고 있는 모습의 두 사람…… 모로 쓰러져 있는 그들…… 하지만 두 사람의 피가 한데 섞인 그 더러운 웅덩이 위를 영원토록 뛰어넘고 있는 그 모습…… 어디에다 구조를 청해야 할까? 단지 어떤 불행을 예고할 수 있을 뿐…… 세계의 종말을 예상할 수 있을 뿐……. --- p.325
잠 속으로 침강한다. 지옥으로 침강한다. 떠나려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녀를 간직하고 싶어 나는 에스테르를 함께 끌고 간다. 그리하여 나는 어떤 꿈 속에서 그녀를 다시 찾게 된다. 거기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곧 나의 무의식이 지금껏 산출한 것 중 가장 끔찍한 악몽이 시작된다. 내게서 나온 것이로되 나의 이해력을 벗어나는 이 악몽 속에서, 나는 그녀의 얼굴과 운명을 나의 질녀 에스테르, 나의 피아노 제자 에스테르의 운명과 뒤섞는다. 오전 일찍, 사람들 틈에 섞여, 짖는 소리 속에 파묻혀, 고철 덩어리에 실린 음악 학교 생도와 뒤섞는다. 나의 창문 아래, 길 건너편에서, 그 시각에 학교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끌려간 그녀와 뒤섞는다. 나는 나의 질녀와 나의 정부가, 음악가와 여배우가, 에스테르와 에스테르가 함께 떠나는 것을 본다. 그것은 한 여인이 다른 여인을 그녀의 계획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여행이다. 그녀 자신 강제로 끌려가는 곳으로 데리고 가는 여행이다. 얼굴 없는 어떤 금속의 무자비한 폭력이 두 에스테르를 그들의 희망과 삶으로부터 찢어 내듯 떼어놓는다. 그녀들은 서로의 운명을 상대에게 투사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자리는 벌써 줄어들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각자의 존재는 반 토막밖에 남지 않는다. 이제 분리할 수 없게 된 두 여인은 한 짝으로 분류된다. 동일한 운송 수단으로 동일한 목적지로 끌려가기 위해 함께 등재된다. 이제 꿈은 최악의 상상이 현실의 스크린 위에 투사된 것이 되었다. 이제 두 에스테르는 하나이다. 그녀들 각각은 내가 알았던 두 에스테르, 즉 음악가인 나의 질녀와 나의 사랑하는 정부인 에스테르 두 사람 각각의 반쪽에 불과한 것이다. --- pp.328~329
나는 수용소 소장이다. 나는 높이 쌓인 나의 진흙 더미 꼭대기에 오만하게 자리 잡고 있는 독일군 장교다. 그리고 나는 창문을 연다. 수용소 마당을 굽어보고 있는 목재로 된 발코니 위로 나아간다. 새로 도착한 자들은 분류되고 정렬되었다. 이제 그들을 장부에 등록할 것이다. SS 장교인 나의 행위 하나하나는 내 안에 있는 다른 존재, 혹은 그의 안에 있는 나에게 구역질을 일으킨다. 나는 나를 감염시키는 이 살 속에 갇혀 있다. 하지만 나는 또한 그의 기생충이기도 하다. 현재로서는 내가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생명과 유일한 의식을 길어 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몸인 것이다. --- p.339
나는 아주 멍청하고도 자만심 넘치는 독일군 장교이다. 또한 아주 비열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실망하리라 상상하면서 그녀더러 그냥 가라고 한다. 다시 옷을 입으라고 명령한 후, 보초를 불러 그녀의 막사에 데려다 주라고 말한다. 거기에서 다른 여자들, 다른 음악가들, 다른 바이올리니스트들, 그녀보다 덜 아름답고 더 어린 처녀들은 그녀에게 갖가지 질문을 퍼부을 것이다. 그녀를 의심할 것이다. 내가 수용소 소장인 독일군 장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스테르가 알몸으로 내 앞에 있을 때, 그녀는 나의 질녀이며 나는 그녀의 삼촌이다. 그리고 또 다른 에스테르 하나가 그녀 안에 숨어 그녀와 뒤섞여 있다. 바로 나의 연인인 그 여인이다. 나는 나의 어린 질녀에게 이 고난의 동반자, 그녀의 언니를 주었었다. 에스테르 뒤에는 에스테르가 있다. 독일군 장교 뒤에는 내가 있다. 이처럼 욕망과 무관심과 금지가 한 다발을 이루며 서로 묶여 있다. 죽음 뒤에는 사랑이 숨어 있다. 그리고 사랑 뒤에는 죽음이 숨어 있다. 증오와 사랑이 있다. 사랑과 사랑이 있다. 나의 질녀 에스테르에 대한 사랑이 있다. 그리고 나의 정부 에스테르에 대한 욕망이 있고, 이 욕망은 벌거벗은 에스테르의 몸을 향해 있다. 독일군 장교의 몸은 나의 악몽의 공간이다. 그의 시간은 나의 잠의 시간이다. --- pp.358~359
세계의 종말은 나의 창문 아래서 시작되었다. 그것은 어디에서든 시작되어야 할 일이었다. 나는 단지 그 시작에 대해 말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을 뿐이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세계의 종말도 언젠가는 끝나게 될 것인지, 아니면 우리에게 부과된 것이 끝없이 계속되는 어떤 종말, 즉 우리를 가차 없이 파괴하고 우리에게서 모든 구원의 희망을 앗아가기에는 충분하지만, 스스로를 파괴하여 결국 사그라지기에는 불충분한 어떤 파국인 것인지 모르겠다. 그것은 파괴적이고 결정적이지만, 또다시 새로운 먹잇감을 쫓아 끝없이 확산되는 어떤 역병이 아닐까? 2042년, 올해 만일 만사가 평소보다 더 나빠지지 않는다면 나는 백서른 살이 될 것이다. 멋진 나이로 보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 나이는 우리가 패배 가운데서 너무도 자주 마주치게 되는 죽음에 대한 모종의 복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 130년이라는 세월은 --- 나로서는 여기에 몇 년이 또 추가된다면 좋겠지만 --- 세 명의 에스테르와 함께 살아온 시간으로는 지나치게 길다고 할 수 없다. 나는 백서른 살이 될 것이다. 하지만 난 내 나이를 감추며,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를 실제보다 백 살 아래로 본다.
--- p.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