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세상엔 여전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오랜 시간 여전할 때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들이 있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는 절대적인 무언가가 어느 날 우리로부터 그 여전한 것들을 순식간에 앗아버리곤 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그저 삶이 우리에게 야박한 탓이다. 그래서 이 삶 속에서 하루를 버텨야 하는 나는 오늘도 연희동 길을 걷고, 매뉴팩트 커피로 가기 위해 16개의 작은 계단을 걸어 올라간다. 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나는 오늘도 이 안에 가득한 ‘여전함’들에 한 번 더 안도한다. --- 「여전한 것들에 대한 예찬」중에서
그리고 다음 날 아침이 밝자마자 부스스한 머리를 대충 손으로 쓸어 넘기고 부엌으로 가서 제일 먼저 커피 물을 올렸다. 곱게 갈린 커피 위로 끓는 물을 조심스레 붓고 나른하게 오르는 수증기를 바라보고 있자니, ‘일상’이라는 단어가 피어오르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는 갓 볶은 에티오피아 원두만의 상큼한 향이 방 안으로 은은하게 퍼지자 나의 우울함도 서서히 사라지는 것 같았다. --- 「이곳에서 행복해지는 방법」중에서
나는 오늘 여름휴가 차 머물고 있는 스위스 취리히의 뒷골목에 자리한 작은 카페 ‘MAME’의 창문 앞에 멈춰 서서 ‘인생 커피’라는 단어의 무분별함에서 오는 피로감과 그 말미에 밀려오는 ‘인생이란 단어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부터 벗어나기로 결심했다. 창문에 쓰여 있는 이 문장 때문이다. ‘The Best Coffee is The Coffee You Like.’ 당신이 좋아하는 커피가 최고의 커피입니다. --- 「당신의 인생 커피는?」중에서
“어때요? 끝내주죠?” 목소리에 깜짝 놀라 눈을 뜨자 바리스타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서양 사람을 흉내 내듯 눈을 한 번 찡긋하더니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게이샤는 저 멀리 사라지고, 좁고 어두운 카페 안엔 나 홀로 남았다. 나에게 아주 조금만 더 시간을 줬으면 좋았을 텐데……. 언젠가 다시 마시겠지만 모든 일이 그렇듯 첫 경험만큼 강렬하진 않을 텐데……. 내 소중한 게이샤의 추억은 이렇게 바리스타의 눈웃음으로 마무리되고 말았다. 말 없이 카페를 나서는데, 문득 로맹 가리의 소설에 나오는 한 구절이 떠올랐다. “마지막 남은 환상의 조각들을 빼앗기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 「조금만 더 시간을 줬으면 좋았을 텐데」중에서
사람과의 관계도 그가 말한 아메리카노처럼 ‘서로 섞이고 완벽히 녹아들 시간’이 필요한 것일 텐데 나는 왜 그리 성급하게 그를 놓아버렸을까. 시간이 많이 흘러 언젠가 12월의 어느 늦은 밤 그 카페를 찾아간다면 그의 커피를 다시 마실 수 있을까? 나를 커피 애호가에서 바리스타로, 그리고 카페 주인으로 만들어준 그의 커피를 꼭 다시 마시고 싶다. 그래서 여전히 인간관계에 한없이 어설픈 나는 멀리서 이 글을 통해 그에게 사과와 그리움을 전한다. --- 「언젠가 꼭 다시 마시고 싶어서」중에서
어쩌면 우연히 나를 이 골목에 들어서게 만든 예쁜 민트색 자전거(그러고 보니 안장은 커피색이었더랬다)는 작고 푸른 그릇에 담겨 나온 아포가토에 대한 복선이 아니었을까. 물론 그럴 리 없다. 단지 우연이었을 거다. 하지만 이런 즐거운 우연을 위해서라면 나는 앞으로도 몇 번이고 예쁜 자전거가 서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리라. 커피를 마시고 가게 밖으로 나오자 맞은편 동네 놀이터에서 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포가토의 마지막 한 스푼에 남은 밀크 캐러멜의 달곰쌉쌀함 때문이었을까,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그날따라 더없이 달콤하게 들려왔다. --- 「이런 즐거운 우연을 위해서라면」중에서
어렸을 때 읽었던 로맹 가리의 단편 소설에서 대충 이런 구절을 읽었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이런 느낌의 문장이었다. ‘만약 정말로 사랑이 그저 뇌에 전달되는 전기 신호에 불과하다면, 그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나는 차라리 그 사실을 모른 채 그저 나의 진심이라 믿고 사랑하고 싶다.’ 커피에 대한 내 생각도 이와 비슷하다. 나는 커피 맛이 단지 어떤 성분과 비율에 따라 정해진다고 믿고 싶지 않다. 그것이 과학적 사실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실험실에 갖혀서 눈을 가린 채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어디선가 좋은 음악이 흐를 때, 올해 첫 차가운 바람이 불어올 때, 좋아하는 사람과 마주하고 있을 때……. 똑같은 커피도 분명 훨씬 맛있게 느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