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가끔씩 급격한 불안과 긴장을 느끼고, 일상의 많은 시간을 학습된 무기력과 싸우는 데에 소모한다. 그러나 백지를 마주 보는 설렘과 소설 쓰기의 즐거움을 깨달아가고 있다. 나의 글쓰기가 벗어날 수 없는 잔혹한 운명이 아니라, 혹독한 삶 속에서 내가 나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라는 것.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인 선택으로 쓰고 있다는 것. 내게도 오랫동안 소진되지 않고 쓰고 싶다는 작가로서의 욕망이 있다는 것. 얼어붙은 자기만의 세계를 단숨에 벗어날 수는 없겠지만, 걸어볼 것이다. 익숙한 사물의 반대편으로 건너가서야 비로소 보이는 풍경이 있을 것이다. 그곳을 향해 걸어볼 것이다. 아니, 이미 걷고 있었다. 언제부터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다.
--- 「작가의 말 ‘내가 노래를 연주할 때, 그 노래는 거기에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중에서
그가 고통스럽다고 느낄수록 고통은 그를 비웃는다. 고통이 그를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고통에 갈급을 느낀다고 말한다.
--- p. 36
죽음은 해일처럼 다가가면 빨아들이고 달아나면 덮쳐온다. 너를 삼키는 순간까지 네가 곁눈질로 볼 수 있는 거리에서 너를 지켜본다.
--- p. 57
어쩌면 오늘, 아니면 내일.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을 욕망하는 일. 내 욕망이 머뭇거림 속에서 실패에 이르는 일. 내가 욕망하는 것은 단 한번의 선택으로만 완성될 것이다. 그리고 지금 나는, 쓸 수 없다. 오늘은 아니어야 하는데. 어제도 그랬듯이. 아직은, 나는 아직. 무슨 말로 항변할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달아난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뛰쳐나간다.
--- p. 70
그런데 지금 당신, 찢고 찢겨나가는 나를 목격해온 당신, 나와 눈을 맞추려고 발을 끌며 오고 있는, 혹은 나를 외면하려는 당신, 당신은 무엇을 보고 있지. 무얼 생각하고 있지. 누굴 만나고 있지. 무엇보다 왜 지금 여기에 존재하고 있지. 무엇을 쓰고 싶지. 아니면 무엇을 읽고 싶지. 당신은 내게 무엇을 바라고 있지. 당신이 무엇을 원하든, 그것은 내게 없다. 나는 그저 멈추지 않고 쓸 뿐이고, 쓴다는 행위는 쓰이거나 읽힐 수 없는 것이다.
이제야 고백컨대, 이것은 소설이 아니다.
--- pp. 94-95
더 많은 계절을 지날수록 알 수 없게 되는 것들이 있다. 새롭게 배운 언어가 앞서 배운 언어를 지우듯이. 뒤따라오는 파도가 해변의 파도를 지우듯이.
--- p. 115
밤이 되어도 어두워지지 않는 도시의 소음을 가로지르면 음악의 여운은 점점 더 강렬해지고, 그런 여운은 다시금 찰나 속에서 무한의 시간을 살게 한다. 나는 어둠속에서 스스로를 연주하는 피아노를 상상한다. 그리고 곧, 다시 내 안에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 p. 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