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스민이 떠오르자 움찔한다. 혼자서 괜찮을까? 우리 둘이 함께라면 바네사 패거리에게 맞서는 일이 가능할까? 가당치도 않다. 패거리 열 명 모두가 육교에 나타날 테니까. 목격자 따위는 없는 편이 오히려 낫다. 도움을 받기는커녕 굴욕감만 더할 뿐이다. 다시 재스민에게 문자를 보냈다. “육교 근처엔 가지 마.”
--- pp.17~18
“겁이 났어. 난 겁쟁이야. 그 배구부 여자애들이 싫어.”
일어서서 킴이 만드는 성을 발로 찼다.
“재스민을 돕지 않았다는 사실이 싫어. 싫다고.”
발로 차고,
“싫어.”
또 찼다.
“싫어.”라는 말 앞에 생략한 건 ‘나’였다.
정말 싫은 건 나 자신이었으니까.
--- p.29
집엔 아무도 없었다. 혼자라는 생각이 들자 결심이 섰다. 내 친부모를 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엄마 모르게. 부츠와 코트도 벗지 않은 채 난간을 꽉 붙잡고 절뚝거리며 계단을 올라갔다. 엄마가 중요한 서류를 어디에 보관했는지 나는 안다. 안방 큰 벽장 바닥에 놓인 금속 상자다.
--- p.84
나는 늦는다, 너는 늦는다, 그가 늦는다, 그녀가 늦는다, 너희들이 늦는다, 우리가 늦는다, 그들이 늦는다, 나는 이 문장들을 완벽히 프랑스어로 바꿔 읊었다.
죽기보다야 늦는 편이 낫지. 슬픔이 밀려왔다. 월요일, 학교에서 더 늦게 출발했더라면 아직 살아서 다음 주를 살고 있을 테지. 더 나은 마지막을 위해 이렇게 노력하는 대신.
--- p.107
“그래. 네 친부모가 이름을 남겼다면 차라리 정식으로 그곳을 방문해서 입양신청서를 작성하는 편이 나았겠지. 그렇지만 그보다는…….”
엄마는 잠깐 당황한 기색이었다.
“보육원 뒷문 가로등 아래에 날 버렸다는 말씀이죠?”
내가 엄마를 대신해 말을 마쳤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 p.115
“만약에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내 장기를 기증해주셨으면 해요, 안구랑 폐랑 간이랑 신장이랑…….” 엄마는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으며 나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신장’이라는 한마디가 엄마를 자극했나 보다. 아마도 킴과 관련이 있어 보였다.
“아휴, 엄마. 그냥 재활용 이야기 같은 거라고요.”
나는 엄마를 웃겨서 눈물을 막아보려고 했다.
--- p.141
우리는 밀고하고, 일러바치고, 고자질하는 중이었다. 이 모든 일은 명예를 저버리는 짓이다. 하지만 나는 바네사가 뭘 할지 안다. 그런 바네사를 오늘 하루만이라도 재스민에게서 멀찌감치 떼어놓기 위해서라면, 이번만큼은 명예를 내려놓는다. 그래서 재스민이 캐머런에 관해 가족들과 이야기할 기회를 얻는다면, 운명도 바뀔 테니까.
--- p.1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