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은 눈을 가늘게 뜨고 먼 위쪽을 응시했다. 거기, 맨 꼭대기에 해당하는 석조층에, 달빛과 안개속에 거의 보일듯 말듯, 바로 퀼, 그 마법의 깃털이 부지런히 움직이는 게 눈에 듸었다. 그것은 돌벽 위에다 무엇인지 한 글자 한 글자 빠르게 적어가다가,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어니, 더더욱 빠른 속도로 맹렬히 끄적이는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하나의 돌이 글씨들로 다 차게되면 다음 돌이 저절로 모습을 나타내며 그옆에 놓여지는 것이었다. 그러면 퀼이 그 새돌에다 날렵한 솜씨로 또다른 글씨들을 적어갔고, 그런식으로 끝없이 놓여지는 돌에다 무수히 많은 신비문자들이 기록되고 있었던 것이다.
'너무 신기해... 탑이 저절로 쌓여지고 있잖아! 갈수록 높아져 가면서 말야...'
에릭이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키아공주가 말했다.
'퀼은 모든 이에게 일어나는 일을 적고 있는 거야. 드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전부 이곳에 기록되는 거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도 말이죠...'
에릭이 덧붙였다. 수호자들이 건네준 기묘한 문자들을 찾으며 에릭이 어느새 은빛 감도는 회색 석조층을 한바퀴 다 돌았을 때였다. 갑자기 키아 공주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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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탑은 나선형으로 똬리를 틀듯이 올려 쌓은 거대한 석조 건축물이었다. 에릭과 키아는 널찍한 탑문 안쪽 마당으로 들어가서 위를 올려다보고는 더더욱 그 웅장한 규모에 감탄했다.
"굉장하군…."
한 단 한 단 쌓아 올려진 투박한 회색빛 돌벽은 까마득하게 높아서, 그 꼭대기는 별빛 가득한 하늘에 맞닿아 있는 듯했다.
"에릭, 우리 이름을 고대 문자로 적어 놓은 종이 가져왔지?"
탑의 내부로 통하는 좁은 입구를 찬찬히 들여다보며 키아 공주가 말했다.
"물론이죠! 자, 슬슬 시작할까요?"
텅 빈 탑의 내부는 무척 고요했다. 단지 저 까마득한 위쪽에서 들리는 무언가 긁적거리는 소리만이 희미하게 정적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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