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늙어서도 할 수 있는 일, 즉 직장이 아닌 직업을 찾고 싶었다. 무엇보다 덜 일하고, 덜 벌고,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고, 적게 소비하는 삶을 원했다. 뭐랄까, 한 번쯤 인생의 판을 통째로 엎어보고 싶었달까. 남편과 내가 서로에게 던지던 사소한 질문들이 하나둘 모여 마침내 우리의 오랜 습관과 단조로운 생활 그리고 출퇴근이라는 견고한 성을 무너뜨렸다.
--- p.12~13
이처럼 나의 결심이란 참으로 연약하고, 변명은 다양하고, 단순하게 사는 길은 이토록 멀다. 그럼에도 이 집은 나를 바꿔갈 것이라 믿는다. 나를 바꾸는 건 나의 결심이 아니라 이 작은 집일 것이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은 말했다. “We shape our buildings and they shape us.” 곧 만들어질 우리의 집이 우리를 모양 지어 갈 것이다. 부디 우리의 삶이 단순하고 조용한 모양으로 빚어지기를. --- p.31
집 마당 곳곳을 둘러볼 때면 이 집의 전 주인과 전전 주인, 그 전 주인이 심은 것들과 내가 심은 것, 바람을 타고 날아와 우연히 자리 잡은 것 등 온갖 것들이 모여 하나의 세계를 이루었음을 깨닫는다. 내게 주어진 것은 이 집의 그 긴 역사 속에 있는 모든 것들이 자연스럽게 무르익어가도록 돕는 일, 그것이 아닐까 싶다. --- p.91
이 생활이 앞으로도 계속될지 아니면 긴 여행으로 끝날지는 알 수 없으나 나는 지금 여기에서 매일의 생을 경탄한다. 이 작은 땅집, 그리고 집의 안팎에서 살아가는 생명들에게서 인내를, 때를 기다리는 법을 배운다. 선택하여 일부만 취하는 법을, 형편껏 사는 법을, 체념하는 법을, 다시 일어서는 법을 배운다. --- p.102
떳떳한 돈을 조금 벌어 조금씩 쓰면서 사는 것. 대신 우리의 시간을 더 많이 갖는 것. ‘직장’이 아닌 ‘직업’을 갖게 되는 것. 도시든 시골이든 한국이든 외국이든, 세상 어디에 떨어뜨려 놓아도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 그것은 젊으니까 한 번쯤 해볼 수 있는 것. 일종의 실험이다. 자발적인 가난이다. --- p.118
살아 있는 고요한 것들, 즉 바다나 산, 매일 다른 모습으로 떴다가 매일 다른 색채를 품고 지는 해를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자신도 모르게 고요해진다. 바다와 산과 하늘뿐이겠는가.
베란다에 놓인 작은 화분의 풀잎도 우리를 치유한다. 다만 그것을 바라볼 잠깐의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 p.128
패션 관련 일에 종사한다는 것의 의미를 잘 안다. 그것은 매순간 새로운 자극을 마주하는 흥분되는 일. 그런데 그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 현기증이 나기도 하는 일이다. 매달 혹은 매 시즌 형언할 수 없는 성취감과 쾌감을 안겨주지만 허탈감도 만만치 않다. 이 일이 과연 이 지구에 옳은 일인가 하는 요상한 물음에 시달리기도 하고, 가끔은 허공에 대고 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 삶을, 속도를, 압박을 알기 때문에 더더욱 간절하게 바라게 된다. 당신은 그곳에서 힘을 내세요. 당신의 나무는 여기에서 이렇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하면서 말이다. --- p.184
시골에서는 모든 것이 소리 없이 오간다. 계절이, 비와 바람이, 꽃이, 열매가. 모든 생명이 소리도 없이 오고 또 간다. 그 모든 생명들 가운데 인간이 있다고 받아들이는 것, 자연이 하는 일은 과연 옳다고 여기는 것. 그 겸손과 체념을 배운다. --- p.209
지금의 이 생활이 행복한가 자문해본다면 글쎄, 염려가 멈추지 않고 허전한 구석은 물론 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떳떳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것은 내가 이곳에서 배운 것 중 가장 중요한 것. 말이나 글로는 결코 배울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 p.250
둥지를 떠나 새로운 삶을 꾸려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이 다리를 건너면 저 다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이곳에 와서 그것을 배웠다. 여기에서 이렇게 살아간다면 정말 행복하겠어요! 라며 부러워하는 방문자들을 향해 미소 지을 때마다 머릿속으론 그런 생각을 했다. 거기에서 행복하셔야 해요. 모두의 삶에는 각자 짊어져야 할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그 모든 일들을 말없이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이곳에서 배웠다.
--- p.2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