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과연 누구신가? 나는 왜 이 1세기 유다인에 대해 책을 또 한 권 쓰고 있을까? 시골 마을 출신 떠돌이 설교자의 삶을 연구하며 수년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전직 목수가 살았던 곳과 그가 방문했을지도 (혹은 안 했을지도) 모르는 유적지들을 찾아다니며 두 주일 동안이나 태양이 이글거리는 이스라엘을 헤매고 다녔을까? 더 나아가 나는 왜 내 삶을 예수님에게 의탁했을까?
예수님은 누구신가?
이에 대한 답은 내가 예수님을 누구라고 믿는가 하는 문제에 달려 있다. 그러니 순례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 맞겠다.
---「머리말 예수님은 누구신가?」중에서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지니셨다. 이는 그분도 먹고, 마시고, 주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성적인 욕망과 충동도 경험하셨다. 어른이 된 예수님은 재미있는 일이 있을 때는 웃었고, 상실감에 빠질 때는 눈물을 흘렸다. 이처럼 그분은 기쁨과 슬픔을 모두 느끼셨다. 인간적 감정을 온전히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서 좌절과 열정을 모두 느끼신 것이다. 기나긴 하루가 끝났을 때는 피곤해하셨고, 이따금 병에 걸리기도 하셨다. 몸이 다치거나 속이 쓰리다고 느낀 적도 있으셨을 것이며, 어쩌면 발목을 삐끗한 적도 있으셨을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땀도 흘리고, 재채기도 하고, 가려운 데를 긁기도 하셨다. 예수님은 죄 말고는 인간에게 고유한 모든 것을 경험하셨다.
---「머리말 예수님은 누구신가?」중에서
멀리 붉은 지붕이 보였는데 그 작고 둥근 붉은 지붕이 눈에 익었다. 문득 《성지》의 뒤표지에서 그것을 본 기억이 났다. 그게 뭐였더라? 나는 여행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골란 고원이 보이는 갈릴래아 호숫가, 카파르나움의 그리스 정교회 성당’이라는 설명이 눈에 띄었다. 카파르나움! 예수님이 공생활을 하신 곳이자 예수님 역시 바라보셨을 이곳을, 전망이 좋은 위치에서 내가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저기 갈릴래아 호숫가 바로 오른편에 카파르나움이 있었다. 물론 그곳은 호숫가에 있었을 것이다. 그래야 어부였던 베드로 사도가 저기에 정착했을 테니까. 아니 저기가 아니라 여기라고 해야겠지.
‘예수님이 바로 여기에 계셨어.’ 나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예수님이 바로 여기에 계셨어.’
---「제2장 ‘네!’」중에서
이 책은 당신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이 한 가지 있다. 바로 그분의 말씀과 행적을 복음서에 기록된 대로 이해할 뿐 아니라, 그분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는 어떻게 사셨을지 생각해 보는 것이다. 고고학 덕분에 그 생활은 점차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팔레스타인의 일상생활에 대한 단편적인 탐구를 통해서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보낸 30년의 삶을 살피게 되면 우리는 어떤 영적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좀 더 구체적으로, 나자렛에서 지낸 예수님의 일상생활은 나중에 그분의 공생활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또 그분의 ‘평범한’ 삶은 우리 자신의 삶과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제4장 나자렛」중에서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의견에 지나치게 의존하면 우리의 심신은 마비될 수 있다. 수년 동안 나는 일반적으로 내가 받아들였던 것에 적응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내 행동의 일부를 맞춰 왔다. ‘그건 말하지 마라, 너무 논란이 되는 일이다. 이것은 하지 마라, 사람들이 너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입지 마라, 사람들이 너를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계속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나는 매번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다.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이건 나를 참으로 무기력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사람에게는 인정을 받을 것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멸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고 싶다는 지나친 욕구 때문에 나는 내 자유를 서서히 제한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자렛에서 거부당하신 이야기는 내 자신이 만든 감옥에서 나를 자유롭게 풀어 주었다. 마치 하느님이 그 피정에서 나에게 이렇게 물어보시는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왜 너를 좋아해야 하느냐? 네가 어떤 종류든 자유를 얻으려 한다면 모든 사람의 마음에 들고자 하는 욕구에서 벗어나야 하지 않겠느냐?”
---「제6장 무시당하심」중에서
‘부르심을 받는’ 방법은 많다. 많은 사람이 부르심받는 것을 소리를 듣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는 몸이 완전히 쓰러질 정도의 영적 체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코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부르심을 받는 것은, 금융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데이브가 발견한 것처럼, 강한 갈망이나 강렬한 매력, 더 나아가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고 싶은 충동으로 드러나는 우회적인 것일 수 있다.
내가 GE에서 일했을 당시, 나 역시 그 업무에 점점 더 불만스러워하는 것을 알았다. 지루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밤, 나는 트라피스트회 수사 토마스 머튼에 관한 TV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머튼의 얼굴에 피어나는 만족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그때까지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무언가가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이야기했다. 그것을 무어라 말로 묘사할 수 없지만(나는 그런 언어로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무언가가 나를 불렀고, 새로운 것을 나에게 약속했다.
부르심은 단지 사제들이나 수도자들만의 영역이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교육, 의학, 예술, 사업 등 온갖 종류의 부름에 강하게 이끌리는 것을 느낀다.
하느님은 우리를 또 다른 방법으로도 부르신다. 즉 원래의 내가 되도록 부르시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고유한 능력을 타고난 개인으로 창조하셨다. 우리는 이미 그렇게 되도록 하느님의 계획 아래 있다. 동시에 하느님은 우리를 점점 더 큰 자유로 초대하신다. 우리를 낡은 방식으로 얽어매는 그물, 곧 우리의 정신 건강에 좋지 않고, 우리가 더 많이 사랑받지 못하게 하는 방식들을 버리도록 요청하시는 것이다.
---「제7장 갈릴래아 호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