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심 이것은 말 그대로 활자로 쌓아 올린 구조물이다. 수백의 작가, 수천의 이름, 수만의 문장, 수십만의 어휘, 수백만의 음운이 그 설계에 동원되었다. 서로를 짓누르고 질식 시키는 언어들의 물리적 층간에서 문학의 오랜 투쟁은 비로소 선명한 의미가 되었다. 남은 문제는, 누가 당선되느냐이다. --- p.9
[예를 들면 [정] 같은 양반. 아, 그분 방대한 지식은 저도 존경합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쓰는 글은 상상력이 결핍되어 있어요. 제가 A와 B를 말하면 A는 동의하지만 B는 미심쩍다고 지적하는 수준이지요. 절대로 C를 내놓지 못해요. 겨우 그런 게 평론이 할 일이라면, 이런 말이 좀 과할진 몰라도, 평론은 그만 사라져도 됩니다.] 선전 포고와 함께 2차전이 시작됐다. --- p.19
정의 발언을 접한 추는 노벨 문학상을 김진명에게 빼앗긴 고은처럼 격분했다. 그날 일을 추에게 전한 장본인이자 이번 신춘문예 심사 위원이기도 한 김의 말에 따르면, 당장이라도 정을 만나 따지려는 추를 여러 차례 말려야만 했다고 한다. 그 후로 오늘까지 추와 정은 사석에서 마주 치면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 p.22
「뭐라던가요.」 「정 선생님께서 제게 [초벌구이]로 함께 가자 부탁하실 거라더군요.」 「아직도 그러네. 참 정치적인 사람이야.」 「두 분 사이 문제에 대해선 전 잘 몰라요.」 「이건 그 양반과 나 사이 문제가 아니에요. 그 사람 심사를 하러 온 건지 나랑 대결을 하려고 온 건지 모르겠어. 문학을 생각해야지. [야만 대 야만], 괜찮아요. 하지만 류 선생도 알 거야. 신춘문예가 어떤 의미인지. 수많은 예비 작가들이 당선작을 읽고 고쳐 쓰면서 연습하게 돼요. 그게 그럴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읽힙디까?」 --- p.46
「정 선생, 너무 [구태의연한] 틀로 판단하려 하지 말아요. 우리 같은 사람의 사고 틀에 갇혀 있지 않다는 점에서 오히려 이 작가를 [문학의 새로운 세대]라고 볼 수 있지 않겠느냐는 말입니다.」 추와 정은 서로를 째려보았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로서는, 방금 추의 입에서 나온 가시 돋친 말에 담긴 역사성을 눈치챌 도리가 없었다. 그저 막연하게 위험한 느낌을 감지했을 뿐이다. 도리어 담당 기자 강은 추의 말을 문자 그대로 독해하여 깊은 인상을 받기까지 했다. 「문학의 새로운 세대라…… 굉장히 좋은데요. 그 구절을 이번 수상작의 타이틀로 잡아도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