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이라는 자연스러운 현상에 자연스럽게 반응하기를 어려워합니다. 먹고살기 바빴던 시대에 살던 부모님 세대들은 더할 나위 없겠지요. 많은 사람이 생존의 문제에 빠져 자신의 감정을 살피고 표현한다는 것을 사치로 여기며 살아갑니다. 아버지의 손을 한 번도 잡아본 적이 없다는 아들, TV 앞에서 단절된 가족 식사, 속마음과 달리 괜히 잔소리만 늘어놓는 어머니…. 주위를 둘러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이 감정에 충분히 기름칠을 하지 못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의 질문은 소명이 되었습니다. ‘되도록 많은 사람이 감정에 대해 제대로 알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 ‘먼저 알게 도와주고 그다음에는 느끼도록 도와주자.’ 나의 생각과 감정, 그리고 행동의 근원을 아는 것은 더 나은 삶을 위한 시작입니다. 그런데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알고 나서는 느껴야 합니다. 내 감정을 충분히 느끼고 반응해야만 진정한 삶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 pp.29~30
우리 마음속에 덩어리지어 있는 감정들을 세밀하게 인식하는 것을 ‘감정의 분화 emotion differentiation’라고 합니다. 감정을 분화시키는 것은 마치 말초신경을 발달시키는 것과 같습니다. 몸 전체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팔다리의 움직임으로도 충분하지만, 젓가락질을 하기 위해서는 손가락 근육이 발달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야구 같은 정밀한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서는 손마디와 손끝의 섬세한 신경을 이용해 직구와 변화구를 적절히 구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희로애락만으로도 살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성숙하고 세련된 인간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감정들을 분화하고 발달시켜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야구선수가 변화구를 잘 던지기 위해 한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하듯이 우리도 대화를 통해서, 음악을 들으며, 조용히 내면에 귀를 기울이며, 책을 읽고 영화를 보며, 상담이라는 전문적 도움을 통해서, 이외에도 여러 매개를 통해 감정을 섬세하게 다듬고 학습할 수 있습니다.
--- pp. 38~39
상반되는 여러가지 마음이 공존하는 것을 ‘양가감정 ambivalence’이라고 합니다. 양가감정은 어른의 감정입니다. 어른이 될수록 우리는 한마디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며 살아갑니다. 저는 뜨거운 국이 “시원하다”고 느껴지는 순간부터 어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외도를 한 배우자가 미치도록 밉고 화가 나면서도 옆에는 계속 있어줬으면 하는 말도 안 되는 마음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니 어쩌겠습니까? 양가감정도 감정입니다.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기 때문에 양가감정도 자연스러운 감정임을 인정해야합니다. 감정은 이렇게 때론 모순적이고, 매우 복잡합니다. 감정은 한 시점에 동시에 나타날 수도 있고, 짧은 시간에 변할 수도 있습니다. 감정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감정에 대해서는 옳은 사람도 없고, 그른 사람도 없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감정이 다르고, 너와 나의 감정이 다릅니다. 똑같은 상황에 처해있다고 해도 서로 다르게 느낄 수 있고, 똑같이 수치심을 표현하지만 서로 다르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은 본디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 pp.41~42
‘화가 난다’라는 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누가’라는 주어가 없습니다. ‘화’가 주어입니다. 그런데 화를 낸다는 것은 다릅니다. ‘내 어깨를 툭 치고 간 그에게 내가 화를 냈다’처럼 사람이 주어가 되고 화가 목적어가 되어 화가 난 구체적 이유와 대상이 나옵니다. 즉 화는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에 화가 나는 것만으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당사자가 화를 냈을 경우에만 실제로 어떤 일이 벌어집니다. 이 당연한 차이를 구분하지 못해 화에 대한 수많은 사건과 오해가 벌어집니다. 화는 외현적인 행동, 특히 공격적인 행동과 관련이 깊습니다. 화가 과하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기도 합니다. 누군가에게 화를 내고 해치는 일이 반복되면서 역사 속에서 화는 부정적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화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며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동시에 화는 다루기 매우 까다로운 감정입니다. 문제는 ‘화’ 자체가 아니라 화가 나는 것과 화를 내는 것을 ‘구분하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 pp.72~74
‘화병’이란 말을 많이 들어보셨지요? 화병의 사전적 정의는 ‘억울한 마음을 삭이지 못해 간의 생리 기능에 장애가 와서 머리와 옆구리가 아프고 가슴이 답답하면서 잠을 잘 자지 못하는 병’입니다. 사람이 아주 오랫동안 화를 품고 살면 이런 증상이 생깁니다. 임상현장에서 교과서처럼 사용되는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 DSM-IV』에는 화병이 한글 고유명사 그대로 ‘Hwabyung’이라고 등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문화적 배경에서 나타나는 ‘분노 증후군anger syndrome’이라고 인정하고 있지요. 문화적으로 고유한 증상으로 인정되기 전까지 화병은 우울증의 한 양상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화병은 우울증과는 다른 신체적 증상이 나타납니다. ‘화병火病’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화병을 앓는 사람들은 몸에서 열기가 느껴지고, 가슴이 답답하며, 속에서 무언가가 치밀어 오르면서, 목이나 명치에 덩어리가 뭉친 것 같은 느낌을 자주 호소합니다. 사람이 오랫동안 화를 품고 참기만 하면 쌓인 화가 마음과 몸을 상하게 합니다.
--- pp.76~78
정체 없는 화가 쌓이면 사소한 갈등에도 예민해지고, 자신도 모르게 갑자기 욕이 튀어나오기도 합니다. 홧김에 사건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화’라는 감정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없어진 대상과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공중에 소리를 지르고 세상을 탓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면서도 습관과 타성에 젖어 무분별하게 화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망적인 소식이 있습니다. 화를 많이 내는 사람들일수록 사실은 의지가 매우 강하고 에너지가 충만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상실에 바로 쓰러지지 않고 화를 낸다는 것은 그만큼 잘살고자 하는 의지가 강하다는 반증이 아닐까요? 그들은 다만 강한 의지를 화를 내는 데 소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의지의 물길을 바꾸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타고난 강한 에너지를 어리석게 사용하는 직무유기를 저지르는 셈입니다. 직무유기를 하지 않으려면 물길을 돌려야 합니다. 화를 제대로 내는 방향으로 말이죠.
--- pp.95~96
함께 있으면서도 혼자 있는 것 같은 그 감정이 얼마나 외롭고 공허한가요? 떠들썩하게 웃고 마셔도 뒤돌아서면 순간 외로워지는 것이 인간 마음입니다. 그러니 너와 나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마음 시린가요? 슬프지만 어떤 노력으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없앨 수는 없습니다. 좁힐 수는 있습니다. 가까운 곳에 살며 마음을 나누고자 같이 살 수 있습니다. 깊은 사명감을 나누기 위해 특별한 모임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사이를 좁힐 수는 있겠지만, 그래도 ‘너와 나’만큼의 간격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학창시절엔 단짝을 찾고, 커서는 연인을 찾습니다. 사람으로 채울 수 없다면 음식, 술, 게임, 쇼핑, 성을 친구 삼아 어디에든 융합하려 노력합니다. 안타깝게도 어떤 노력으로도 사람 사이의 거리를 없앨 수 없듯이 어떤 행동으로도 공허함을 없앨 수는 없습니다. 사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공허함을 받아들인다는 뜻일 겁니다. 나 말고도 외로운 남과 관계를 좁히며 살아야 하는 여정이겠지요.
--- pp.129~130
사람 사이에 거리를 느끼며 사는 것은 나 혼자만이 아닙니다. 누구나 어느 정도는 공허하고 허전합니다. 다만 느끼는 정도가 다를 뿐입니다. 내 마음에 공허함의 크기가 크다면, 만나면 즐겁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며 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가족이 이 역할을 해준다면 제일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기회는 많습니다. 살면서 만나온 좋은 친구들, 나를 이해해주는 따뜻한 연인, 힘이 되는 공동체는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점은 나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어도 나를 비판하지 않을 만한 사람들, 소명을 함께 공유하며 또는 소명을 향해 나아가는 노력을 함께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들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람과 함께하세요. 마음속 구멍은 혼자서는 절대 줄일 수 없습니다. 함께 체온을 나눌 때에만 공허함이 옅어지니까요. 그것도 서서히요.
--- pp.132~133
부끄러움은 나의 보이고 싶지 않은 부분을 누군가가 지켜본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감정입니다. 문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 자체가 아닌 이를 감추려는 노력에서 나옵니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이 감정들이 지나간다고 해서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습니다. 부끄러움을 가리려는 과도한 시도가 완벽주의, 강박적으로 무언가에 탐닉하고 이를 취소하는 행동들, 분노억제와 분노폭발 행동 등의 문제를 유발합니다. 안타깝게도 가리려는 시도 중 어느 하나도 죄책감과 수치심을 덜어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 관리와 대인관계에 실패했다는 자괴감만 가져옵니다. 자신의 가치를 더욱 깎아내리기만 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위로가 되는 사실은 부끄러움 없는 인격의 성장은 없다는 점입니다. 결국 부끄러움이 주는 인간의 유한함과 약함을 경험해보는 것이 성장의 시작입니다. 그래야 거리낌 없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습니다.
--- pp.155~156
사람은 누구나 불안해합니다. 불안 치료는 불안을 공기처럼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공기는 우리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지만 사람들은 공기를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러다 가끔 바람이 불 때면 ‘아, 공기가 있었지’ 하고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공기가 제 할 몫을 하지 않나요? 아닙니다. 매일 필요한 산소를 공급해주며 묵묵히 그 자리를 채우지요. 불안도 그렇습니다. 불안은 사람들이 위험을 피할 수 있도록 우리 마음속에서 묵묵히 제 기능을 합니다. 그러니 평소에는 괜찮다가도 바람이 부는 듯 인생의 소소한 사건이 있을 때마다 ‘내가 불안하구나’ 하고 깨닫게 되지요. 높은 산에 올라가면 가쁜 숨을 내쉬듯이 힘든 시절에는 더 불안할 수 있습니다. 날 때부터 폐기능이 약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힘을 주어서 숨을 쉬어야 하듯, 다른 사람보다 예민한 사람들은 마음에 더 신경을 쓰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정도면 괜찮습니다. 사람에게는 불안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고, 불안하면서도 여전히 도전할 수 있는 신비한 능력이 있으니까요.
--- pp.202~203
사람은 중요한 대상을 잃었을 때 상실감을 경험합니다. 저는 이 글을 쓰기 바로 전에 강력한 일상적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졸음을 쫓으려고 커피를 마시다가 실수로 노트북에 커피를 쏟아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가지를 잃으면서 일상적 상실감을 느낍니다. 이때 내가 잃은 것이 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에 따라 쉽게 넘길 수도 있고, 우울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내가 그것을 잃은 상태라도 앞으로 나아갈 것인가, 앞으로 가기를 포기할 것인가에 따라 우울함이 일상적 기분으로 남을 수도 있고, 일상생활을 지속적으로 방해하는 병리로 번질 수도 있습니다. 우울하면 다 우울증이라고요? 우리는 하루에도 열두 번씩 우울한 마음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상실과 고통이 많은 인생살이가 우울증을 만들 수 있다고요? 그렇지 않습니다. 상실이 개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그 상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사람들은 모두 다르게 반응합니다.
--- pp.211~213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Elizabeth Kubler Ross는 “사람들이 상실을 겪으면 대개 비슷한 단계로 반응을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애도는 ‘부정-분노-타협-우울-수용’의 모든 단계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는 과정입니다. 상실을 겪으면 그 후 오랜 시간에 걸쳐 마음속에 나타나는 모든 감정들을 억압하지 말고 느끼며 표현해야 합니다.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당사자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화를 낼 수도,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다시하려고 애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비판하지 않고 그저 함께 있어주어야 합니다. 당사자가 진짜 우울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슬픔 뿐 아니라 행복하고 감사했던 추억도 나누며 생과 사, 행복과 불행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체험해야 합니다. 진정한 애도란 우울을 건너뛰지 않습니다. 우울에만 멈추어 서서 좌절을 곱씹지도 않습니다. 우울해도 살아갈 수 있다는 용기가 내면에 자리 잡을 때, 상실은 내 안에서 소화되고 애도되기 시작합니다.
--- pp.227~228
나를 알고 내 안에 숨 쉬는 감정을 알아야 합니다. 앞 장에서 감정들을 살펴보며 무엇을 알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을 얻었습니다. 하지만 아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요리를 책으로만 배우면 맛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손맛 없는 음식점에는 손님들이 드나들지 않듯이 감정도 음식처럼 손맛이 필요합니다. 감정을 알기만 하는 사람은 손맛 없는 밋밋한 사람이 감정을 아는 체하는 꼴입니다. 그래서 이번엔 아는 것 외에 우리 삶에 필요한 ‘사랑’을 다루고자 합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내 감정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노력은 개인의 영역이 아닙니다. 개인의 노력으로 가능하다면 아는 것으로 충분했겠지요. 앎은 혼자서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면서도 충분히 쌓아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받아들이고 표현하는 과정은 타인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위니콧의 말을 빌리자면 ‘나에게 충분히 좋은 good enough 사람’ 다시 말해 ‘사랑을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나 역시 누군가에게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 pp.259~260
감정은 스스로 극복할 수 없습니다. 마치 웅덩이에 물이 잔뜩 고여 있다고 해서 그곳에서 전기를 뽑아낼 수 없는 원리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사랑에 있는 의지를 빌려 감정을 지켜내고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비단 남녀 간의 사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고가는 온기. 네가 그런 감정을 가질 수 있다고 수용해주고, 그랬느냐고 공감해주고, 그래도 된다고 위로해주는 사랑. 아픈 아이를 향한 부모의 내리사랑, 한 번쯤은 잘못을 눈감아 주는 선생님의 사랑, 잘못된 길을 가는 아이에게 회초리를 들고 그 자책감에 눈물 흘리며 상처에 연고를 발라주는 사랑,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 자신을 지키는 사랑, 그래도 아직은 살아갈 만하다며 매일 경험하는 그 사랑을 말합니다. 에리히 프롬은 모든 사람은 무언가로부터 분리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사랑을 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사랑만이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합니다. 사랑만이 타인과 나를 결합시켜 감정을 받아들이고 소통하게 합니다.
--- pp.263~2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