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가 보기엔 헨델이 선율의 천재 같기만 한데, 그의 선율이 모국어처럼 자연스럽지 못했다는 것은 상당히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아름답고 단순한 선율이 노력도 없이 천재성에서 그냥 저절로 생긴다고 믿어서는 안 된다. 베토벤의 선율은 누가 보아도 저절로 나온 것같이 보이지만 종종 내면에 그 선율을 품고 있는 몇 년간의 내적 노력이 필요했다. 비록 헨델이 선율을 널리 확산시키는 실력에 도달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여러 해 동안 혹독한 훈련을 거치면서 견습 세공사로서 아름다운 형식들을 쥐락펴락하기를 배우고, 복잡한 것과 천박한 것을 선율에 전혀 남기지 않은 다음에야 비로소 가능했던 일인 것이다. _ p.35
이탈리아에서의 삶이 달콤해서 도취할 만했다 하더라도, 그가 시간을 낭비한 것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는 친구 코렐리를 따라 열광적으로 그림을 좋아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신중하게 쌓은 딜레탕티즘으로 여러 장르를 시도하였고, 여러 나라가 섞인 나폴리 사회는 헨델의 무심한 듯한 호기심을 자극했다. 나폴리라는 도시에서는 스페인의 영향과 프랑스의 영향이 서로 경합하고 있었다. 스카를라티처럼, 두 나라 사람들 중 누가 이기든 관심 없었던 헨델은 양쪽 스타일 모두로 작곡을 시도했다. _ p.49-50
1720년부터 죽을 때까지 그가 이룬 모든 예술은 만인의 것이었다. 그는 한 극단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대중과 함께 전투에 참여하며, 거기에 놀라운 생생함을 투여한다. 오페라를 1년에 두세 편이나 쓰고, 연기는 뛰어나나 규율은 없고 자부심만 많아 다들 제정신이 아닌 듯한 극단을 이끄느라 진을 빼고, 말 타고 다니느라 지치고, 파산 때문에 쫓기고, 자기를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닌 토양과 기후에서는 살 수 없는 이탈리아의 허약하고 시들어가는 오페라 한 편을 런던 땅에서 자라게 한다는 역설적인 과업에 20년간 천재성을 바쳐가며 말이다. 패배로 그친, 절대 이길 수 없는 이 처절한 투쟁의 끝에 헨델은 걸작의 길에 씨를 뿌리며 자신의 이름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게 되는 위대한 오라토리오들을 창작하여 그의 예술의 정점에 이르게 된다. _ p.74
1737년 4월 12일 혹은 13일, 마침내 기계는 삐걱하고 망가지는 소리를 냈다. 그가 마비에 걸린 것이다. 마비는 오른쪽 몸에 찾아왔다. 손이 말을 듣지 않고, 지력조차 마비된 듯했다. 그가 없으니 극장도 문을 닫고 파산했다. 여름 내내 헨델은 지독한 우울 상태에 빠져 있었고 치료도 거부했다. 이제는 끝이구나 싶었다. 마침내 친구들이 8월 말경 그를 아헨의 온천에 보내는 데 성공했다. 온천욕 치료는 기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며칠 만에 그는 병이 나았다. 10월에 다시 런던으로 왔고, 그 즉시 거인이 부활하여 투쟁을 다시 시작했으며, 작곡을 재개하여 석 달 동안 오페라 두 편과 여왕의 서거를 추도하는 훌륭한 『장송곡Funeral Anthem』을 썼다. _ p.90-91
위인들의 삶에서 우리가 종종 목격하는 일은, 모든 것을 다 잃은 것 같을 때나 모든 것이 더없이 저조할 때 그들이 정상頂上에 아주 가까이 다가와 있다는 사실이다. 헨델은 비록 패배한 것처럼 보였지만 바로 이때 그는 곡을 쓰고 있었다. 이 곡이 세계적으로 그의 명성을 확립해주게 된다. _ p.93
영국 대중의 적의가 이렇게까지 악착같았던 적은 없었다. 이미 세 번이나 헨델을 죽이려 했던 증오 품은 책동이 그를 향해 다시 시작되었다. 런던에서 그의 오라토리오 연주가 있는 날은, 헨델 곡을 들으러 오는 사람이 없도록 사람들을 축제에 초대하기로 서로 짰다. 볼링브로크와 스몰렛은 헨델을 망치려는 몇몇 부인들의 집요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호러스 월폴은 헨델이 오라토리오 연주회를 지휘할 때 관객들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보러 가는 것이 당시 유행이었다고 말한다 _ p.96
낭만주의가 널리 퍼지면서 헨델의 천재성의 의미는 퇴색되었다. 베를리오즈는 만약 헨델을 잘 알았더라면 그에게서 자신이 꿈꾸었던 큰 대중 예술의 모델을 찾았을 테지만, 그를 결코 이해하지 못했다. 당시의 모든 음악가 중 헨델의 정신에 가장 가까운 사람은 슈만과 리스트였다. 그러나 이들은 그 지성이 명료하고, 마음 넓게 두루 공감하는 예외적 인물이었다. _ p. 104-105
그러나 독일에서 헨델의 예술이 진정으로 깨어난 것은 10년쯤밖에 안 되는 일이다. 헨델이 위대하다는 것은 모두 느꼈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독일 사람들이 헨델의 놀랄 만한 극적 천재성을 진정으로 느꼈던 때는 『헤라클레스』와 『데보라』가 연주되었던 1895년 마인츠의 첫 헨델 축제에서인 듯하다. 이제 우리 프랑스인들이, 그리스인들의 예술처럼 비극적이고도 환히 빛나는 이 위대한 예술의 생생한 의미를 프랑스에 스며들게 해야 할 것이다. _ p.105
그는 격렬하든 참을성 많든, 어떤 이상주의적 의지를 삶과 예술에 억지로 투여하는 부류가 아니다. 인생이라는 책에 삶의 공식을 쓰는 그런 부류도 아니다. 그는 보편적인 삶을 들이마시고 이에 동화되는 천재다. 그의 예술적 의지는 명백히 객관적이다. 그것은 잠시 있다 없어지는 것들로 이뤄진 숱한 구경거리에 따라, 나라에 따라, 그가 사는 시대에 따라, 심지어 유행에 따라 달라진다. 여러 영향에 맞추고 장애들이 필요로 하는 바에 맞춘다. 그는 다른 스타일과 다른 생각 들을 흡수해 그것과 결합한다. 그러나 이 본성이 지닌 동화 능력과 더없는 균형이 어찌나 큰지, 그것이 외부적 요소들로 이루어진 덩어리에 침윤되는 것은 사람들이 결코 느끼지 못한다. 모든 것이 금방 흡수되고 지휘되고 분류되어버리는 것이다. 이 무한한 영혼은 마치 바다와 같아서 세상 모든 강을 합쳐도 그 갈증을 달래줄 수 없고, 그 태평함을 흔들어놓을 수도 없다. _ p.109-110
헨델의 천재성을 보여주는 이런 특성은 절대 잊혀서는 안 된다. 이 음악을 ‘보’지도 않고 그것이 표현하는 바를 귀로만 듣는 데에 만족하는 사람―즉 그것을 순전히 형식적인 음악으로만 판단하는 사람―, 그 표현적이고 시사적인, 때론 환각에까지 이르는 힘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그 음악을 영원히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이는 그림을 그려내는 음악이다. 정서, 영혼, 상황, 게다가 정서의 틀이 되며 그 시적이고 도덕적인 색채로 그것을 물들이는 시대와 장소 들까지 그려내는 음악. 한마디로 본질적으로 그림 같고 극적인 예술이다. _ p.116
헨델에게서 꾸준한 것은 음화音畵, 즉 음악으로 풍경과 자연의 인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스타일화된 그림, 베토벤의 말처럼 “그림이라기보다는 감각의 표현”, 즉 우박이 쏟아지면서 치는 폭풍우라든가, 잔잔하거나 성난 바다, 한밤중의 커다란 그림자, 영국 시골에 내리는 황혼, 달빛 받은 공원, 봄 새벽, 새들의 깨어남 같은 것을 시적으로 떠올리게 하는 그림이다. 『아시스와 갈라테아』,『이집트의 이스라엘인』, 『명랑한 사람, 슬픈 사람, 온화한 사람』, 『메시아』, 『세멜레』, 『요셉』, 『솔로몬』, 『수잔나』 등은 헨델에게서 플랑드르 화가와 낭만주의 시인의 기질을 동시에 드러내는 자연화의 풍성한 화랑이 되어준다. _ p.138
헨델에게는 언제나 대중적인 혈맥이 있었다. 방금 필자는 대중적 영감을 환기시켰는데, 그의 기억은 그것으로 꽉 차 있었고 그 혈맥 덕에 그의 오라토리오들은 생기를 띤다. 무궁하게 새로워져 향토적인 원천으로 돌아가는 그의 예술은 그 시대에 놀라울 만큼 인기 있었다. (…)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것은 단지 어느 정도 진부한 이 인기만이 아니다. 평범한 사람들 마음에 드는 예술에는 예술다운 가치가 없다고 보는 것은 어리석은 오만이거나 편협한 마음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헨델의 음악에 특히 대중적인 성격이 있다고 보는 것은, 그 음악이 정말로 민중을 위해 만들어졌지, 륄리와 글루크 사이의 프랑스 오페라처럼 애호가들 중 엘리트를 위해서만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_ p.181-182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