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희야.” “네, 아버님.” “언젠가 「타임」지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조국이 해방되지 않았으면 친일파로 남아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아버님.”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고 아무도 그런 말은 안 하지만, 나는 그렇게 말했다.” “네, 아버님.” “기업가는 결코 애국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가는 나라는 망해도 자신의 기업을 살려야 한다. 나는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알겠느냐?” --- p.22
“등수가 뭐가 그리 중요하오? 나는 창의성을 보는 거요. 이십대에 법조문이나 달달 외워 고시에 합격하면 평생 권력이 보장되는 그런 사회가 정 기자에게는 그리도 좋소?” “음.” “18등 아니라 꼴찌라도 1등보다 나은 사람이 있소. 아인슈타인이 그랬고, 내가 그랬소.” 의림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가장 웃기는 건 당신네 사회는 과학자에 대한 대접이 세계에서 제일 엉망이란 거요. 수학, 과학은 미래를 이끄는 요체요. 하지만 당신네 사회는 수학, 과학 선생님은 말할 것도 없고 세계적인 과학자조차 푸대접하는 사회요. 영어에만 미쳐 있지. 나는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에 가난한 과학도들을 도와준 거요. 그들을 훌륭한 과학자로 성장시킨 내가 그들로 인해 돈을 버는 것에 대해서 당신네 사회는 뭐라 말할 자격이 없소.” “…….” --- p.238
“생각해보시오. 북한이나 중국 놈들이 미사일에 슈퍼컴퓨터를 붙여 뉴욕을 공격한다면 미국의 운명은 끝장이오. 슈퍼컴퓨터를 장착한 핵미사일을 생각해보시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이 회의장 전체를 다 차지하던 크기의 슈퍼컴퓨터가 이젠 손목시계만 해진단 말이오. 당연히 값도 엄청나게 싸지는 거요. 그놈들은 모든 미사일에 슈퍼컴을 붙이고 핵탄두든 백색가루든 실어서 미국으로 보낸단 말이오.” “삼성전자를 북한이나 중국이 장악할 리는 없지 않습니까?” “물론이오. 그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되지. 하지만 불안하기 짝이 없소. 남한과 북한이, 아니면 남한과 중국이 또 어떤 거래를 할지 모르는 일 아니오. 지금 한국의 대통령이 펼치는 햇볕정책이란 건 결국 북한이나 중국과 가깝게 지내자는 얘기 아니오? 우리는 절대로 삼성전자를 그냥 둘 수 없소.” 대통령 수석고문은 잠시 말을 끊었다. 사람들은 이제야 그가 결론을 내놓는다고 생각했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우리는 완벽한 방법을 생각해냈소. 그래서 여러분들을 이 자리에 모신 거요.” 사람들이 모두 심각한 표정으로 수석고문의 입술을 주시했다. “삼성전자를 우리가 장악해버리는 거요. 바로 M&A를 통해서 말이오.” --- pp.310-311
“사실 우리는 한국의 차세대 전투기 구입 사업에 약간 관여하고 있었네.” “그래? 어떤 연유로?“ 동우는 다시 한 번 놀랐다. “그것은 결국 엄청나게 비싼 기계를 고르는 사업이 아닌가? 우리 국민이 낸 세금으로 말일세. 나는 기계를 고르는 일에는 과학기술자가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거야 그렇지만…….” “군인이나 행정관리들이 개입하면 그들이 말하는 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지만, 과학기술자가 참여하면 그들은 모든 걸 다 내놔야 하네. 적당히 넘어갈 수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 나라에 그런 전통을 세우려고 했지. 전문가들로 구성된 과학기술평가단이 낸 정확한 평가보고서가 그런 일들의 기본이 되도록 말이야.” “음.” 동우는 민서의 말을 들으며 뭔가 깨달아지는 게 있었다. 사회가 과학기술자를 홀대한다고만 생각해왔지 과학기술자들이 스스로 나서서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적이 없었다. 찾아보면 사회를 위해 과학기술자들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든지 있는데도 그조차 인문계 출신들이 좌지우지하는 걸 보고만 있었던 게 사실이었다. 그 자신조차 그에 대해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 p.405
“삼성이 반도체를 하면 안 되는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삼성은 돈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한국에는 반도체를 같이할 수 있는 멤버들이 없습니다. 즉, 주변기술의 수준이 너무도 낮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반도체는 생산에서부터 판매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견제를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도체에 대한 거의 모든 기술은 미국에서 나옵니다. 이 친구들은 매년 수백 건씩 특허를 내고 있습니다. 공장을 짓고 생산 라인을 다 마련해놓으면 이들이 시비를 걸어옵니다. 특허 도용이라는 구실로 말입니다. 재판에 시달리는 중에 또 새로운 제품이 나옵니다. 결국 로열티를 물어가면서 사업을 해야 한다는 얘긴데, 그러다 보면 남는 게 없습니다. 재판이나 로열티뿐이면 그래도 해보겠는데, 문제는 새로운 기술 개발에 대한 부담입니다. 이 분야는 워낙 기술 개발이 빨라 공장 하나 다 지어놓으면 금방 다른 기술이 나와 애써 지은 공장이 고물이 됩니다. 한국은 이런 기술 전쟁에 뛰어들 능력이 전무합니다. 그러니 제대로 생산 한 번 못하고 회사가 도산할 가능성이 너무 큽니다. 단언하건대 삼성은 절대로 반도체에 뛰어들어선 안 됩니다.” --- pp.422-425
“나는 단 한 푼의 로열티도 받지 않겠소. 하지만 내게 돌아올 몫을 어떻게 써주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소.” “어떻게 말입니까?” “이 땅의 모든 학생들이 법대나 의대, 상대가 아닌 우선 이공대에 가서 공부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도록 필요한 곳에 쓰였으면 좋겠소.” 임원들은 무슨 말인지 몰라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지금 우리나라의 이공계 박사학위 취득자 수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것은 알고 있소?” “그래서 저희도 고민입니다.” “삼성전자는 이공계 박사 과정에 있는 학생들 개개인에게 아무런 조건을 달지 말고 일인당 이천만 원 이상의 장학금을 지급하시오.” “네?” “내 바람은 그거요. 내 몫은 거기에 써주시오. 아 참, 그리고 해외의 석학들을 무한정 끌어오시오. 한국인이든 외국인이든 상관하지 말고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