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강
제1강에서는 먼저 우리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이 책을 소개할 것입니다. 주로 『손자』의 역사적 변화를 이야기할 것인데, 특별한 점은 그것이 경전이 되는 과정입니다. 이런 역사적 변화는 다소 무미건조하고 재미없기 때문에 독자들에게 인내심을 가질 것을 당부합니다. 그것은 닫혀 있는 문입니다. 그 문을 열어야만 그 안에 있는 마당이 매우 넓고 방도 아주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25쪽)
병서는 중국 고대의 유산으로 수량이 매우 많은데, 대략 계산해보더라도 선진시대부터 청대에 이르기까지 4000여 종이 있습니다. 병서에는 병서의 경전이 있습니다. 송宋 신종神宗 원풍 연간(1078~1085)에 병법에 대한 학문을 세우고 병법에 대한 경전을 출판했는데, 『무경칠서武經七書』는 바로 당시 병법의 경전입니다. 여기에는 『손자』 『오자吳子』 『사마법司馬法』 『당태종이위공문대唐太宗李衛公問對』 『울요자尉?子』 『황석공삼략黃石公三略』 『육도』가 포함됩니다. 송대 이후로 무과武科 시험에 응시하는 사람은 모두 이 일곱 가지 책을 군사軍事의 교과서로 삼았습니다. 일곱 가지 책 가운데 『손자』가 첫째입니다.(28쪽)
『손자』는 병서이지만 일반적인 병서가 아니고 고도의 전략과 철학의 색채를 띠고 운용의 묘를 매우 중시하는 병서입니다. 『손자』는 병서 가운데 지위가 가장 높은, 경서 중의 경서입니다.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에서 『손자』를 “오랜 세월 동안 병법을 이야기한 것 중의 시조百代談兵之祖”라고 했는데, 조금도 틀리지 않은 평가입니다. 다음 강의에서 이 짧은 책이 전 세계에 퍼져 있으며,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음을 언급하려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 허풍이 아닙니다.(29쪽)
『삼국지연의』에서 장송은 “『맹덕신서孟德新書』는 조조가 『손자』 13편을 표절한 것이오. 우리 촉蜀 땅의 어린아이들도 외울 수 있는 것이니 천하를 속이는 것이오”라고 했습니다(제60회). 이것은 저자가 근거 없이 꾸며낸 말입니다. 실제로 조조는 『손자』를 표절한 적이 없을 뿐 아니라 『손자』를 정리하는 데 큰 공이 세웠습니다.
우리가 오늘날 『손자』를 읽은 수 있는 것은 실은 조조가 남긴 책 덕분입니다. 처음으로 『손자』에 주석을 붙인 것도 조조입니다. 『손자약해孫子略解』가 그 책인데, 원서의 서문이 『태평어람太平御覽』 권606에 남아 있습니다. 조조는 서문에서 “내가 병서와 전쟁 계책을 많이 보았지만 손무가 쓴 책이 가장 깊이가 있다. (…) 자세히 계획하고 신중하게 행동하며, 분명하게 계획을 세우고 깊이 꾀해야 한다고 했는데, 거짓말이 아니다”라고 했습니다. 조조는 『손자』가 모든 병서 가운데 가장 잘 쓰인 책이지만 원서에 주석이 없어 읽어도 이해할 수 없고, 편폭이 너무 길어서 읽는 이가 요점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조조는 『손자』 13편에만 주석을 붙이고 나머지 것들은 없애버렸습니다.(54~55쪽)
조조는 병서의 서열을 매겨서 모든 병서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3대 경전이고, 3대 경전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손자』이며, 『손자』 가운데 두드러진 것은 13편이라 했습니다. 여기서 말한 ‘두드러진 세 가지’가 병서의 존폐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57쪽)
제2강
내 생각에 『손자』는 높은 지붕 위에서 병에 든 물을 쏟는 것과 같아서 단계가 높을수록 철학의 맛이 풍부합니다. 그러나 단계가 높은 물건일수록 더욱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높은 곳에 오를 때는 위로 향해 한 걸음 한 걸음씩 올라가야 하며, 아래층으로 내려올 때도 한 계단씩 내려와야 합니다. 여러분이 이론을 실제 생활에 적용하려 한다면 이론이라는 고층 건물에서 천천히 아래로 내려와야 할 것입니다. 조급하고 귀찮아서, 엘리베이터가 없다고 해서 창문을 열고 곧바로 뛰어내려서는 결코 안 됩니다. 어떤 철학이든 형이상학에서 형이하학에 이르기까지 한번에 관철할 수는 없으며, 중간에 단계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병서는 비록 실용을 이야기하고 있기는 하지만 또한 가장 추상적인 모략에서 단번에 구체적인 실전으로 건너뛸 수는 없으므로 중간에 실력과 제도와 기술에 관한 내용으로 지탱해야 합니다. 이런 고리마디가 없으면 고리와 고리의 연결이 매우 위험하게 됩니다. 오늘날의 확장도 마찬가지로 반드시 단계의 전환이 있어야 합니다. 단계의 전환이 없으면 어떤 것이라도 모두 병법을 가지고 노는 것이어서 대단히 위험한 일입니다.
중국의 군사軍事 전통은 모략을 중시하고 기술을 경시하기 때문에 병서를 답습한 피해가 더욱 큽니다.
앞에서 말한 조괄의 잘못은 특정한 교리나 사상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 현실을 무시하고 이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려는 태도, 곧 교조주의敎條主義입니다.
교조주의자라고 반드시 모두 지식인은 아니며, 다만 책을 잘못 적용한 사람일 뿐입니다. 지식인이 책을 오용할 수 있고, 지식인이 아니라도 책을 오용할 수 있습니다. 교조주의와 경험주의는 항상 서로 어울리는 것입니다. 지식인이 비지식인을 데리고 어떤 용어를 빌려 마음과 힘을 하나로 모아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니 그 위해가 가장 큽니다.
옛사람의 말에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실천을 잘하는 것은 아니며, 실천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能言之者未必能行, 能行之者未必能言”(『사기』 「손자오기열전孫子吳起列傳」)라고 했습니다. 좋은 병서라고 해서 반드시 싸움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쓴 것은 아니며, 싸움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반드시 병서를 쓰는 것도 아니고 쓴다고 해서 반드시 뛰어난 병서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책의 이론과 실제 적용 사이의 관계를 분명히 구분하지 못합니다.(93~94쪽)
제3강
『손자』는 권모류의 대표적인 책입니다. 권모를 배우려면 『손자』를 읽어야 하고, 형세를 배우려 해도 『손자』를 읽어야 합니다. 음양과 기교도 『손자』에서 다루고 있습니다.
계計에 대한 이 세 조목의 개념은 핵심 중의 핵심입니다. 계 자체가 바로 권모이고, 바로 ‘올바름으로 나라를 다스리고, 기이함으로 군대를 부린다’는 ‘이정치국, 이기용병以正治國, 以奇用兵’의 구현이며, 바로 병서의 네 가지 개념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계는 전체이면서 부분이기도 하고, 시작인 동시에 끝이며, 이론이면서 실제 응용이기도 합니다.
계는 전쟁의 전 과정을 꿰뚫고 있습니다. 『손자』의 모든 편에는 계산이 꿰뚫고 있습니다.
권모와 형세는 다릅니다. 이 둘은 모두 병략兵略에 속하고 모두 계모計謀를 이야기하지만, 계에는 큰 계략과 작은 계략이 있습니다. 권모는 큰 계략이며, 형세는 작은 계략입니다. 앞의 것은 전략이며, 뒤의 것은 전술입니다. 의학 서적에 비유하면 권모는 의학 경전이며, 형세는 치료 방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의학 경전에는 이론 체계가 있으니, 머리가 아프면 머리를 치료하고 다리가 아프면 다리를 치료하는 식으로 증상에 따라 약을 주고 처방전을 내는 것이 아니라 혈맥·경락·골수와 음양·표리·허실에 따라 “온갖 병의 근본과 생사의 분기점百病之本, 死生之分”을 말하는 것으로, 생리와 질병의 원리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여러 가지 치료 방법도 포함하고 있습니다(『한서』 「예문지·방기략方技略」).
제4강
지금부터 이야기할 「작전」은 ‘전쟁 삼부곡’의 둘째 단계로서 ‘먼저 계획을 세운 뒤에 싸운다先計而後戰’고 할 때의 ‘싸움戰’에 해당합니다.
먼저 제목부터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작作’은 ‘시작한다’는 뜻입니다. ‘전戰’은 고서에서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의 두 가지 경우로 사용됩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전쟁·전역戰役·전투를 두루 지칭하고, 좁은 의미에서는 다만 야전野戰을 가리키며 그 중에서도 특히 진을 치고 서로 싸우는 야전을 뜻합니다. 고대 중국에는 국야제國野制라도 제도가 있는데, 여기서 국國은 도시이며, 야野는 시골을 가리킵니다. 야전은 성을 공격하기 전에 도시 밖인 시골의 들판이나 황야에서 서로 싸우는 것을 말합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가장 먼저 진행되는 것은 반드시 야전입니다. 춘추시대의 야전은 대부분 두 나라의 국경이 맞닿은 넓은 곳에서 펼쳐졌는데, 이런 지대를 ‘강역疆場’이라 부릅니다. 양쪽이 모두 진을 완전히 갖춘 뒤에 대결했으므로 이것을 가리켜 “모두 진을 갖춘 것을 전쟁이라 한다皆陣曰戰”라고 했습니다. 상황은 흔히 깃발을 펄럭이며 한 번 격돌하면 전투가 곧 끝나서 시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짧은 경우에는 “이들을 물리치고 아침을 먹겠다滅此而朝食”(『좌전』 성공成公 2년)라고 했으니, 곧 전투를 끝내고 나서야 아침을 먹는다는 것으로 밥 한 끼 먹을 시간이 걸릴 뿐입니다. 긴 경우도 하루를 넘기지 않았는데, 동이 틀 때 시작해서 날이 어두워지면 철수했습니다(『좌전』 성공 16년). 설령 행진하는 거리를 더하더라도 한 달이 넘는 경우는 드물었습니다. 고대 중원의 황허강 유역의 국가는 야전에서 전차전을 위주로 하여 보병을 전차에 부속되게 했고, 전차와 보병을 함께 편제해서 진을 치고 싸웠습니다. 『주례周禮』 「하관夏官·사궁시司弓矢」에는 “당궁과 대궁은 전차전과 야전에 유리하다唐(唐弓)·大(大弓)利車戰·野戰”라고 했으니, 전차전은 야전과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춘추시대 전체를 보면 전차전이 도리어 야전의 주체였습니다. 춘추시대 중기와 말기에는 보병이 크게 발달했습니다. 전국시기 말기에야 비로소 기병이 나타났습니다. 전차와 기병, 보병을 함께 사용하는 것은 후대의 야전 방식입니다.
제4강
군사비용은 군사비용일 뿐 도덕으로 설명하지 않으면 힘이 없습니다.
여기서는 ‘온전히 해야 할 다섯 가지와 파괴할 다섯 가지五全五破’를 제시합니다. 이를 해석해보고자 합니다.
먼저 ‘국國’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세상에 전해지는 고서에서 언급된 ‘국國’은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는 본래부터 ‘나라國’를 기록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다른 하나는 ‘방邦’ 자를 피휘避諱해서 고쳐 쓴 것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한나라 고조의 이름이 유방劉邦이기 때문에 한나라의 고서는 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는 것을 피해서 ‘방邦’ 자를 ‘국國’ 자로 바꾸었습니다. 예를 들면, 국가國歌는 원래 방가邦家였으며, 재상을 가리키는 상국相國도 원래는 상방相邦이었습니다. 선진시대에 돌이나 금속에 새겨진 문장 자료에는 모두 이렇게 적혀 있으니, 지금의 명칭은 한나라 이후에야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나 고서에 쓰인 ‘국國’이 모두 피휘해서 고친 글자는 아닙니다. 예를 들어 ‘중국中國’은 본래부터 그렇게 불렀으며, 결코 ‘중방中邦’이라 부르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의 ‘국國’은 무엇일까요? 아무래도 ‘전국위상全國爲上’이 ‘전방위상全邦爲上’이라고는 수긍할 수 없습니다. ‘방邦’과 ‘국國’은 무엇이 다를까요? ‘방’은 국토의 봉역封域이며, ‘국’은 이 봉역의 중심으로서 곧 국가의 수도입니다. 고대에는 항상 수도로 국가를 대신해서 가리키곤 했습니다. 그것이 국가를 대표할 수는 있지만 국가와 완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국’은 도시이지만 일반적인 도시가 아니라 중심 도시입니다. 그 다음 등급의 도시를 고대에는 ‘도都’나 ‘현縣’이라 불렀습니다. ‘국’은 여러 개일 수 없는데,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하나뿐이지만 수도를 옮긴 뒤에는 수도首都·유도留都·배도陪都 등으로 구분되어 두세 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도’나 ‘현’은 매우 많아서 수십 개에서 백여 개까지 있을 수 있습니다. 서주西周 성왕成王 때의 청동 술잔인 하준何尊의 명문銘文에 ‘중국’이 보입니다. 명문에는 ‘택자중국宅玆中國’이라 새겨져 있는데 뤄양洛陽에 수도를 정한다는 뜻입니다. 뤄양은 수도로서 천하의 중심인데, 서양 속담의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처럼 도시를 가리키는 것이지 나라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한나라 때는 ‘중국’으로 ‘외국’과 구별했습니다.(전국시대에 이미 이런 용법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당시의 오성점五星占에 “다섯 개의 별이 하늘 가운데 흩어져 있는데 동쪽으로 몰리면 중국이 유리하고, 서쪽으로 몰리면 외국에서 병사를 쓰는 자가 유리하다五星分天之中, 積於東方, 中國利 ; 積於西方, 外國用兵者利”(『사기』 「천궁서天宮書」와 『한서』 「천문지天文志」에는 ‘외국’이 ‘이적夷狄’으로 적혀 있습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국’은 한漢 왕조이며, ‘외국’은 주변의 오랑캐와 변방 민족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국國’이 과연 국가인지 수도인지는 단정할 수 없습니다. 어떤 것이든 뒤에 나오는 네 가지 등급보다는 더 큰 개념입니다.
제5강
“이길 수 없는 쪽은 방어하고, 이길 수 있는 쪽은 공격한다. 방어하는 것은 부족하기 때문이며, 공격하는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이다不可勝者, 守也 ; 可勝者, 攻也. 守則不足, 攻則有餘”라는 구절은 실력으로 공수의 ‘세’를 세운다는 것으로, 적을 이길 수 없으면 수세守勢를 취하고, 이길 수 있으면 공세攻勢를 취한다는 뜻입니다. 수비하는 것은 아군의 실력이 적보다 약하기 때문이며, 공격하는 것은 아군의 실력이 적보다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원문의 “방어하는 것은 부족하기 때문이며, 공격하는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守則不足, 攻則有餘”이라는 구절은 간본에는 “공격하는 것은 부족하기 때문이며, 방어하는 것은 여유가 있기 때문攻則不足, 守則有餘”이라고 되어 있어 정반대입니다. 이 두 가지 표기는 한나라 고본古本에 모두 있습니다. 나는 간본의 ‘불가승不可勝’과 ‘가승可勝’을 윗문장의 ‘불가승’과 ‘가승’에 대응해서 분석해보았습니다. 윗문장에서 ‘이길 수 없는不可勝’ 쪽은 아군이며, ‘이길 수 있는可勝’ 쪽은 적입니다. 그것은 아군이 수세를 취하는 것은 충분한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며, 적이 공세를 취하는 것은 실력이 아군보다 못하기 때문이니, 사실은 공격이 수비보다 못해서 수비하는 쪽이 강세이고 공격하는 쪽이 약세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은 비교적 이상하지만 어느 정도 일리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방어하는 각도에서 말하자면 공격하는 쪽은 방어하는 쪽에 비해 소모가 커서 방어하는 쪽은 넉넉해 보이고 공격하는 쪽은 부족해 보일 수 있는데, 많은 군사가들이 이런 경험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면, 클라우제비츠는 “일반적으로 공격하는 자는 강하고 수비하는 자는 약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반대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금본의 표현은 『한서』 「조충국전趙充國傳」과 『후한서』 「풍이전馮異傳」, 『잠부론潛夫論』 「구변救邊」 등의 인용문에 보입니다. 나는 “수즉부족 공즉유여守則不足, 攻則有餘”가 더 이치에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하 생략)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