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하기 어려운 어린 시절에는 집이 부유했다고 얼핏 들었으나 기억할 수 있는 시절부터는 굶기를 밥 먹듯 늘 빡빡한 생활의 연속. 청소년기 결핵으로 몽롱한 삶을 이어가다 회복기에 김종식 선생을 만나 수많은 날 술 마시고 서상환 선생에게 유화를 익히다 1975년 다방형식으로 화랑 시작, 외상 찻값이 과도하게 밀려 2년 만에 폐업. 다방 손님으로 출입한 수많은 문화계 사람들과 폭넓은 교유를 체험하게 된 것은 미래를 위한 큰 소득. 일탈해서 수행 삼아 힘에 겨운 엉뚱한 취지 아래 부산시립, 경남도립미술관 등에 작품 800여 점을 기증하는 등 열정적 삶을 지향했으나 지병에 의해 번번이 좌절. 그 와중에도 평생을 목구멍 풀칠하는 문제로 전전긍긍하다가 50세 때쯤부터는 다른 건 몰라도 밥걱정은 벗어났다 생각했는데… IMF, 미국의 서브프라임, 동일본 대지진 등을 거치면서 소박한 바람의 노후 생활은 산산조각이 나고 다시 밥걱정 쪽으로 뒷걸음질치다. 결국 죽기 전에는 보장이 안 되는 천형의 목구멍 문제에 인생이 다시 포박되다. 1987년 한국화랑협회 초대 미술품 감정위원장을 역임했고 1989년 부산청년미술상을 제정, 현재까지 20년간 시행 중이다. 2009년 시 전문 월간지 『심상』 신인상으로 때 늦은 턱걸이로 문단에 등단했으며 밀양시 명예시민, 경상남도 명예도민, 해운대포럼상, 자랑스러운 화랑인상, 부산시 문화상, 문화훈장(화관장)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