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라인이 잘 드러나는 펜슬 스커트야, 여성지에서 직장인의 필수품이라고 했다. 그래서 입고 갔을 뿐이었다. 신문이나 방송에 종종 등장하는 패션 전문가들은 또 직장인의 옷차림이 너무 무난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포인트 삼아 반짝이는 귀걸이를 달았다. 가끔은 기분 전환용 속눈썹을 붙이기도 했다. 9센티 하이힐이야 여자의 자존심 아니던가.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런 조언들이 지극히 비현실적이라는 사실을. 옷차림으로 많은 사람들이 나를 오해했다.
‘쟤는 일은 안 하고 저런 걸로 승진하려나 봐.’ ‘도대체 머리에 든 게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어휴, 재수 밥맛!’
남자들의 오해는 달랐다. 유쾌하지 않다는 점은 공통적이었지만.
‘나보고 어떻게 해 달라는 건 아닐까?’
바라건대, 이런 시행착오를 겪는 20대 여성은 나 하나로 끝났으면 한다. 그러나 지금도 옷차림만으로 자신이 가진 엄청난 능력과 열정을 평가절하 당하는 후배들이 적지 않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 pp.39-40
신입사원들에게는 회식 장소 예약은 가끔씩 떨어지는 과제다. 그러나 결코 반길 일은 아니다. 누구나 만족하는 장소를 고르기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법인 카드를 지닌 상사와 중간 관리자, 그리고 신입사원의 취향은 트로트와 힙합만큼이나 거리가 멀다. 게다가 일단 회식 장소 예약을 담당하게 되면, 1차를 마친 후 다음 장소에 대한 부담까지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수준이 높다’는 반어법으로 와인 바에서 한방 먹은 내가, 2차는 또 어떻게 결정하라는 건지. 1차 삼겹살, 2차 호프집, 3차 노래방이란 회식의 공식은 괜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 p.48
어느 날부턴가 우리 동기들 4명을 두고 ‘핑클 4인방’이라고 부르면서부터였다. 직장 상사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유독 더 심했다.
“어이. 핑클 4인방, 재밌는 얘기 좀 해봐. 노래도 좀 부르고. 이런 게 너희 주특기잖아?”
순진하게도 난 당시 그런 모욕을 받으면서도 선배의 명령이라면 참고 웃어야 하는 줄 알았다. 속셈이야 빤했다. 나를 포함해, 우리 동기를 실력이나 노력보다 여자를 파는 소집단으로 만들어버리겠다는 계산이었다. 뒷담화의 여왕이 그렇게 부르기 시작하자, 다른 동료들도 덩달아 우리를 그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일단 그 별명이 붙자, 우리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그렇게 비쳐졌다. 일과 성취에는 관심 없이, 남자 선배나 상사들의 술자리에나 끼는 4명의 계집애들. --- p.113
대학을 졸업하고 입사하면 여자 선배는 당신에게 잊지 않고 꼭 이 말을 할 것이다.
“여자의 적은 여자라는 걸 명심해.”
실제로 그런가? 직장 생활 통틀어 5년여의 경험상 결론은 절반의 예스다. 바꿔 말하면 절반은 틀린 말이라는 얘기다.
그렇다면 왜 여자의 적은 여자인가? 실제로 많은 경쟁 상황에서 여자는 여자로부터 뒤통수를 맞는다. 여자 후배나 친구들을 도왔다가 욕먹는 일도 다반사다. 여자 동료들이 나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었던 적도 많았다. 챙기는 척 마음을 떠보기에 바빴던 여자 선배들은 또 몇이나 됐던지.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자. 이 모든 문제가 여자여서 벌어진 것은 아니다. 직장이라는 곳은 전쟁터다. 전쟁에서 성별이 나뉠 리 없다. 여자들이 여자들에게 당한 경우가 많다고 느끼는 이유는 따로 있다. 우리 직장에서 남자들은 여자를 경쟁자로 생각하지 않는다. 여전히 그게 현실이다. 특히 20대 여성을 자신의 라이벌로 생각하는 남성 동료는 없다. --- p.136
한 매체에서 그에게 온라인 음식 칼럼 연재를 맡겼다. 그런데 조건이 좋은 편은 아니었다. 3천자가 넘는 원고에 원고료는 고작 7만원. 전문 필자들의 비슷한 분량 원고료가 기본 20만원이었던 데 비하면 터무니없이 적었다. 게다가 일주일에 한 번 연재로는 생활비도 안됐다. 누구라도 거절하거나, 그저 적당히 때울 법했다. 그러나 그는 달랐다. 인터넷을 뒤져 무명이지만 유능한 카투니스트를 찾아냈다. 이메일로 연락한 후 직접 그를 찾아 협상했다. 자신의 칼럼 내용을 삽화로 그려 달라는 주문을 하기 위해서였다. 카툰 비용은 원고료 7만원 가운데 2만원. 카툰비가 적은 대신 작가 이름을 달아준다는 게 인센티브였다. 협상은 멋지게 성공했다. 7만원짜리 칼럼에 참신한 카툰까지 딸려 나왔다. 해당 매체 편집국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 p.140
회사 동료가 당신 뒤에서 당신을 뭐라고 부르는지 귀동냥해 본 적이 있는지? 당신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사실 몇 안 된다. 회사가 클수록 더 그렇다. 별명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친한 사이가 아니면 별명을 부르는 이도 드물다. 정작 당신은 이름이나 별명 대신 한두 마디 수식어로 지칭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말 많은’이나 ‘친절한’ 혹은 ‘옷 잘 입는’ 등이 그 예다. 당신의 특성므 함축하는 이 수식어야말로, 바로 당신의 캐릭터이자 존재감이다.
아예 당신을 지칭하는 말이 없는 경우도 있다. 그럴 때는 그저 이렇게 불린다.
“걔 있잖아, 걔.”
이 경우가 최악이다. 존재감이 아예 없는 경우다. 그러나 당신을 수식하는 형용사, 즉 캐릭터가 있다면 일단은 존재감이 있는 경우다. 당신의 캐릭터는 실제 당신보다도 더 당신다운 것으로 비친다. --- p.151
“당신은 어느 편이냐?”
솔직히 이 물음은 썩 달갑지 않다. 이 질문의 의도를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내가 자기편인지를 묻는 셈이다. 이해가 안 가는 바도 아니다. 그들의 잣대대로라면 난 어정쩡한 존재다. 난 보수 언론의 대표 격에 자진해 입사했다. 동시에 그 곳으로부터 험한 꼴로 쫓겨났다. 그렇다고 진보적인 매체라는 곳과의 관계도 늘 좋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선동이나 투쟁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보다는 나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더 잘 먹고 잘 사는 법에 더 관심이 많다. 라이프스타일 전문 기자라는 내 본업 때문에, 가끔씩 대중의 충동적 소비를 조장하려는 사람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불현듯 특정인이나 특정 경향에 대해 공격하고 나설 때도 있다. 자가당착적인 극단주의자나 우리 사회의 미래를 흔들 잘못이 눈에 띌 때면, 난 정치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 p.321
20대 여성의 정치관은 완벽하지 않다. 대부분은 분명히 정리돼 있지도 않다. 그러나 정치관을 확정해가는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는 생각이다. 기성세대의 그것을 무작정 따르거나, 그것에 늘 끌려 다닐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된다. 차라리 자신의 마음 속 깊은 욕망에서 출발하는 것이 낫다. 난 어려서부터 늘 잘 먹고, 잘 살고 싶었다. 그러나 대학생이 되면서 사회 전반의 변화 없이 그 욕망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도 깨닫게 됐다. 모두가 더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절감했다. 20대 여성은 이렇게 개인적 욕망과 사회적 동기를 접목시켜 나감으로써 정치적 견해를 형성할 필요가 있다.
--- p.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