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는 목욕탕에 자주 가지 못했다. 집에 목욕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있는 건 아니었지만, 여름에는 보통 등목으로 목욕을 대신하고 가을에서 봄에 걸쳐 서너 번 목욕탕을 찾는 게 고작이었다. 그래서 두꺼운 내복을 입는 한겨울의 설날 어귀에 목욕을 가면 무릎과 팔꿈치, 그리고 뱃살이 튀어나온 부분에는 눈에 보일 정도로 때가 딱지처럼 더덕더덕 붙어있었다. 우리는 탈의실에서 탕으로 들어갈 때마다 행여 누가 볼세라 때가 낀 부분을 수건으로 가리고 주위 눈치를 보곤 했다. --- 『부모』 중에서
상기의 도시락이 양은이 아니라 사발 공기라는 것을 알만한 친구들은 다 알고 있는데도 상기는 끝내 돌아앉지 않았다. 나는 시작이 어렵지 한번 같이 먹으면 상기도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며 상기 밥공기를 친구들이 둥그렇게 앉아있는 쪽으로 옮겨 놓기 위해 잡았다. 그 순간 상기와 나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상기는 싫다고 하고 나는 괜찮다고 하며 서로 밀고 당기다가 손에서 미끄러진 밥공기가 교실 바닥에서 산산조각이 나며 깨어졌다. 시커먼 보리밥 덩이가 반찬종지에서 쏟아져 나온 멸치젓갈과 한데 뒤엉켜 나뒹굴었다. 상기는 초라하게 널브러진 도시락이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인 채 밖으로 나가 버렸다. --- 『도시락』 중에서
밀양댁이 외상값을 갚겠다고 장부를 들고 왔었다. 보통 한 달에 한 번 결산을 했는데 주판을 놓던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 번 계산을 했다. 그러다가 외상값이 적힌 수첩 한 장이 찢겨나간 것을 알았다. 그걸 알면서도 어머니는 행여 상대방이 난처해질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머니가 알고 있다는 걸 눈치 챈 밀양댁이 지레 겁을 먹고 단골을 옮긴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그걸 예사로 넘기지 못하고 밤잠을 못 이루며 끙끙 앓았다.
“그 아줌마 안 온다고 장사가 안 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내가 장사 안 될까 봐 이러는 줄 아니? 장사 때문에 친구 잃은 게 원망스러워서 이러지.”